[Dr.황세희의몸&마음] 운동선수 뇌 손상이 치명적인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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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세계챔피언 재탈환과 프로복싱의 부흥을 꿈꾸던 복서가 경기 종료 직전 날아온 치명적인 펀치로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급성 경막하 출혈’. 그를 죽음으로 내몬 이 병은 분초를 다투는 의학적 초응급 상황이다. 인간의 뇌는 얇은 지주막과 좀 더 질긴 경막이 둘러 싸고, 그 위를 견고한 두개골이 덮고 있다. 급성 경막하 출혈은 뇌의 외상, 특히 예상치 못한 큰 충격을 입은 뇌가 순간 뒤틀리면서 발생하며, 이때 심하게 손상되고 붓는다. 두개골에 가로막혀 팽창할 여백이 거의 없는 뇌는 일단 붓기 시작하면 급속한 뇌압 상승으로 직결된다. 뇌압은 평상시엔 10㎜Hg 정도지만 급성 경막하 출혈 땐 5~6배, 심하면 10배(100㎜Hg) 이상 치솟는다. 이 정도 압력에 놓인 뇌는 두개골과 목뼈를 연결하는 부위에 뚫린 구멍으로 자살성 탈출을 시도한다. 뇌가 밑으로 빠지는 현상인데 호흡 중추가 있는 뇌간이 눌리면서 사망하게 된다.

따라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선 신속하게 뇌압을 떨어뜨리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 실제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다친 뇌의 두개골과 경막을 최대한 크게 열어주는 수술을 시행하는데 떼낸 두개골 지름이 10㎝ 이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집도의가 경막을 여는 순간, 고인 피가 쏟아지고 잇따라 압력에 짓눌려 있던 뇌가 ‘끊임 없이’ 삐져 나온다. 의사는 눈에 보이는 뇌를 한참 동안 제거한 뒤 적당한 시점이 되면 뇌 제거를 멈춘다. 그리곤 경막을 얼기설기 꿰매 뇌 위에 얹고 그 위를 두피로 덮어준다. 떼낸 두개골은 뇌압이 정상으로 돌아 올 훗날을 기약하며 따로 보관한다.

수술 후에도 뇌압강하제를 정맥 주사하면서 혼수와 저체온(34도 정도) 상태를 유지하는 등 뇌압 강하 노력은 계속된다. 물론 이런 처치를 제때, 제대로 해도 뇌 손상이 큰 환자는 회복되기 어렵다.

급성 경막하 출혈은 발생 자체를 차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얼굴이 돌아가면서 뇌가 뒤틀릴 정도의 충격은 다행히 그 순간 생명을 위협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뇌는 손상된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후유증도 당연히 크다. 상대방 펀치를 잘 피하기로 유명했던 세기적 복서 무하마드 알리도 경기 도중 얻은 크고 작은 뇌 손상이 축적돼 중·노년기를 파킨슨병과의 투병생활로 보냈다.

머리에 가해진 충격과 뇌 손상의 상관관계는 머리를 맞고 자란 아이 세 명 중 한 명이 정신지체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다는 보고서에서 잘 드러난다.

타인에 대한 공격성은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돼 있는 본능인데 문명사회에선 직접적인 표현이 금기시된다. 자연히 인간은 격투기 등을 통해 공격자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대리만족을 얻고자 한다. K-1·권투·킥복싱 등의 공격적 스포츠가 지구촌 곳곳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다.

하지만 이번 비극에서 보듯 선수의 심각한 뇌 손상 예방을 위한 안전장치 마련은 필요해 보인다. 들판에 핀 풀 한 포기도 생명이 있기에 소중하다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생명에 관한 문제가 아닌가.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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