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그 무덥던 여름방학의 후반부를 나는 그렇게 내 주변 사람들과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짓으로 보냈다.나는 거의 아무 하고도 만나지 않고 지냈는데,머리를 빡빡 깎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은둔하기 위해서 머리를 그렇게 깎았다고 말하 는 편이 차라리 옳을 거였다.그러니까 나는 외톨이로 많은 시간을 견디면서도,나하고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던 셈이기도 하였다.
나는 거의 매일을 내 방구석에 틀어박혀 주소록에 적힌 이름들을 들여다보면서 그것들이 내게 어떤 무엇이었으며 혹은 지금의 내게 무엇인지를 곰곰이 따져보고는 하였다.그러다가 질력이 나면아무 생각없이도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읽거나 비 디오 테이프를빌려다 보면서 시간을 죽였다.
그즈음의 어머니는 매일마다 오후만 되면 근처의 실내수영장에서살다시피 했다.어머니는 갑자기 부어오른 자존심…아랫배 부분 말이다…때문이라고 하셨지만,사실은 지난번 아버지와의 동해 여행에서 누적된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풀고 계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무지막지한 여름을 선풍기 하나로 버텼는데 그건 마치백년만의 태풍 속에서 달랑 비닐우산 하나만 들고 서 있는 것과다름이 없었다.아버지 말씀으로는 에어컨은 웃돈을 주어도 구할 수가 없다는 거였고,그러면 어머니는 그래도 누 구누구네 집을 보니까 어디선가 잘만 구해오더라고 반박하셨지만 어쨌든 우리집에는 여전히 에어컨이 없었다.나는 정 더위를 견딜 수 없을 때면「날개」에 가서 앉아 있고는 하였다.
신촌의 카페 「날개」는 방학이라서 그런지 썰렁했다.게다가 성능좋은 에어컨을 잔뜩 혹사시키고 있었으므로 더욱 썰렁하였다.주인 아주머니 말로는 채산이 맞지는 않지만 자기자신이 너무 더위를 타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는 거였다.나는 그 주인아주머니가 더위를 타는 사람인 것을 감사하게 여기면서 멍한 표정을 하고 에어컨 바람을 얻어쐬면서 창가에 앉아 있고는 하였다.아는 얼굴들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만 없었다면 날개는 그 여름에 내가 찾아낸 거 의 완벽한 피난처였다.
「날개」는 내가 과거를 돌아보는데 날개를 달아주었다.써니와 둘이 나란히 앉아…우리는 마주앉지 않았다…커피를 홀짝이면서 담배를 피우던 곳도 거기였고,게다가 써니가 갑자기 사라지고 나서써니엄마와 마주앉았던 곳도 거기였다.뿐만 아니라 하영이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도 그 빌어먹을 놈의 카페인 「날개」였던 거였다.그러니까 거의 1년전인 8월19일이었다.나는 그때가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첫 수능시험을 보기 전날이었으니까 날짜까지 기억하는 거였다.
하영이와 봄에 밤벚꽃놀이를 함께 갔다온 뒤로,학교에서 우연히 스친 걸 제외한다면 서너달 만에 하영이를 정면으로 만나는 날이었다.하영이가 「잠깐만 보지 뭐」라고 전화를 해서 만나기로 약속이 된 거였다.나는 하영이에게 선물로 무얼 줄까 하고 고민했었다. 우리는 방과 후에,한여름이어서 아직도 날이 훤한 저녁에날개에서 마주앉았다.하영이는 내게 은박지로 포장된 초콜릿을 내밀면서 시험을 잘 보라고 그랬다.나도 준비해간 선물을 내밀었고하영이가 급하게 포장을 풀었다.그건 작은 금빛 포크 였다.삼지창이라고도 부르는.
『내일 시험 볼 때 잘 찍으란 말이야.』 나는,내가 도망치지못하게 콱 찍으란 말이야 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