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 볼 <32> 새해엔 ‘플로’하며 삽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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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헝가리 출신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창안해 낸 ‘플로(flow)’라는 개념이 있다. 흔히 ‘∼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고 할 때의, 어떤 행위에 깊게 몰입한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삼매경(三昧境)과도 비슷한 개념이다.

 플로는 암벽 등반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할 때, 글을 쓸 때와 같이 한 가지 일에 몰두할 때 나타난다고 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이라 해서 플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물론 한 가지 일에 몰두한다 해서 항상 편안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마라톤 35δ㎞ 지점에서 육체적 고통이나, 어려운 수학 문제를 끙끙거리며 풀 때 정신적 압박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성취감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플로를 제대로 느끼고 사는 축구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이영표(30·토트넘 홋스퍼)를 꼽을 수 있겠다. 그는 “모든 경기에서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고, 그 과정에서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대학 시절 그를 가르친 정종덕 전 건국대 감독은 “영표는 드리블하는 재미로 축구를 했다”고 회고했다. 체격이 좋지도, 빠르지도, 슈팅이나 패스가 정교하지도 않은 그가 프리미어리거로 자리 잡은 이유가 여기 있다. 이영표는 모든 훈련과 경기에서 축구의 즐거움을 느끼며 몰입했다.

 플로의 반대 개념이 ‘심리적 엔트로피(무질서)’다. 자신의 능력에 비해 도전 과제가 너무 높을 때 나타나며, 불안·공포·고통·분노·질투 등을 수반한다.

 지난주 K-리그 중장기 발전 공청회에서 한 발표자의 얘기다. 폐타이어를 끌면서 체력훈련 중인 고교 축구선수에게 “훈련이 재밌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재미없어요. 힘들고 따분해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한창 축구에 재미를 붙여야 할 고교 선수한테서 그런 말을 듣고 그 발표자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선수뿐이겠는가. 목적도 불분명하고 재미도 없는 훈련을 시키는 지도자는 어떤가. 학부모의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불안한 신분, 성적에 목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즐거운 축구’는 언감생심이다.

 플로를 느끼지 못하고 자란 선수가 프로가 되면 어떻게 될까. 불안과 부담감에 짓눌려 그라운드로 들어선 그는 판정에 항의해 웃통을 벗고, 상대 선수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있다. 히딩크가 말한 창조적인 플레이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새해 축구장에서는 제발 묵은해에 있었던 지저분하고 부끄러운 일들이 재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가 혼신의 노력을 다해 집중하고, 그 과정에서 재미와 깨우침을 얻었으면 한다. 웰컴투풋볼에 과분한 사랑을 보내준 독자께도 새해 인사를 전한다. 무자년에는 가정과 생업의 현장에서 풍성한 플로를 느끼시기를….

정영재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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