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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집념의 승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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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남들에게는 별것 아닌 일인지 몰라도 제게는 사법시험 합격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50대 중반의 검찰 수사관이 사무관(5급) 승진시험에 붙었다. 7번 낙방 뒤의 합격이었다.

'7전8기' 인생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은 수원지검 성남지청의 정병산(55.사진) 수사관. 그는 최근 천신만고 끝에 얻은 사무관 시험 합격증과 함께 임채진 검찰총장이 보낸 난(蘭)을 받았다.

1978년 9급 행정직(당시에는 5급을류)으로 검찰에 발을 들여놓은 지 29년 만에 간부직으로 승진한 것이다.

정 수사관은 6.25전쟁 중이던 52년 전남 승주군 황전면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땔감을 구해 파는 10여 가구가 모여사는 두메산골이었다. 우등생이었던 그는 황전북초등학교 6학년 때 순천 매산중학교 진학시험에 붙었다. 하지만 학비를 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집안 살림을 돕겠다며 이웃 마을의 이발소에 취직, 손님 머리를 감겨 주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16세 때 '도둑 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했다. 당시 밥 한 끼 사먹을 돈도 없었다.

서울에서 다시 이발소 종업원 일을 했다. 가진 기술이라고는 그게 다였기 때문이다. 20세 무렵 검찰 일반직 시험을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서점에서 시험준비용 책을 보고 막연한 희망을 가진 것이었다. 내리 세 차례 고배를 마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영어는 넘지 못할 벽 같았다. 낙담 끝에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병원에서 깨어났다. 이후 한 차례 더 낙방을 하고 26세 4전5기 끝에 합격, 검찰 수사관이 됐다.

그는 서울지검 집행과에서 근무를 시작해 천안지청, 서울지검 공안부, 법무부 검찰2과, 서울지검 특수부 등을 두루 거쳤다. 2005년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 근무할 때는 황우석 교수 사건 수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 수사관의 사무관 도전은 2000년 시작됐다. 통상 이 시험은 200명 정도가 응시해 약 50명이 합격한다. 4년제 대학 졸업생이 응시생의 대부분이다. 2006년까지 잇따라 7번 떨어졌다. 형법.형사소송법 논술형 시험이 늘 문제였다. 나이 제한 때문에 올해가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합격을 통보받은 순간 눈물을 흘렸다.

정 수사관은 "시험 준비 때문에 경조사에 참석하지 못해 집안에선 아예 열외의 인물이 됐고, 거듭된 실패에 무능한 존재로 낙인 찍혔다는 생각에 대인기피증까지 겪었다"고 그동안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용기를 준 검찰 선후배와 동료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 수사관은 내년 봄 정식 발령을 받는다. 승진 덕분에 정년도 60세까지로 3년 늘어났다. 그는 "새해에는 그동안 말없이 고생을 참아준 아내를 위한 시간을 많이 가질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큰아들(25.숭실대 4년)의 사법시험 1차 합격이 새해 소망"이라고 덧붙였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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