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아쥐면 여성이 느껴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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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31면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와 여자라도 서로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은 ‘면도와 생리’다. 남자는 자라나는 수염을 보며 하루를 확인하고, 여자는 짜증과 불안(아닐지도?)으로 한 달을 넘나든다. 안 하면 찝찝하고, 하자니 번거롭고 귀찮지만 일단 하고 나면 상쾌한 느낌이 되는 서로의 행사란 점은 공통이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필립스 아키텍

생리대에 관한 내용은 알 턱이 없다. 하지만 남자만의 도구인 면도기엔 여자도 관심이 높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남자에게 선물하는 1순위 품목에 면도기가 올라 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생리대를 선물해 주는 남자가 없는 걸 보면 이 얘긴 맞다.

면도의 결론은 마초들의 상징이었던 예리한 칼로 하는 게 가장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다. 서부영화에서 보았던 가죽 밴드에 쓱쓱 칼을 갈아 야외에서 하는 면도 장면은 수놈끼리의 공감대로 향수를 자극한다. 하지만 아무리 멋있게 보여도 칼을 쓰는 면도는 과거의 유산이다. 바쁜 도시 생활은 남자만의 작은 즐거움마저 빼앗았다.

최선은 차선의 방법으로 현재를 메우게 된다. 안전 면도날을 거쳐 전기면도기가 대세다. 나 또한 현재의 필립스 아키텍으로 정착했다.

면도의 진화는 사실이다. 1939년 최초로 전기면도기를 발명한 필립스의 업적은 잊었어도 아키텍의 감촉과 보는 즐거움, 소리로 전달되는 면도의 쾌감은 오롯이 남았다.
필립스는 독특한 회사다. 마크로와 마이크로를 아우르는 제품 생산 범위, 중후장대의 산업용 기기에서 면도기와 주전자에 이르는 자잘한 가정용품을 다 만든다.

게다가 혁신과 창조를 내세운 기발한 발명품들을 생산해 낸 ‘세계 최초’의 영예를 몇 개나 갖고 있다. 세상을 뒤덮은 CD도 필립스의 작품이다.

곡선(arc)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인 아키텍 또한 가만히 있지 못하는 필립스가 사고친 물건이다. 잘 깎이는 면도기를 넘어 디자인과 편리까지 담은 변신합체 로봇이라고나 할까. 공상과학을 형상화시킨 듯한 외형은 미래를 상징하고 과거의 칼 맛을 그대로 남긴 내부 기능은 마초의 향수를 현재에 재현시켰다. 충전기 버튼을 누르면 지지 틀의 각도가 꺾여 크래들로 빨려들어간다. 세척과 건조가 함께 이루어지는 메탈릭 오브제는 마치 영화 ‘트랜스포머’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남자만의 장난감인 아키텍 면도기는 짜증스러운 면도의 귀찮음을 즐거움으로 바꾸어 놓는다. 세 개의 둥근 커터는 피부 굴곡에 따라 각기 다른 각도로 밀착된다. 그 유연한 움직임과 곡선의 본체를 감아쥐는 그립감에는 여성의 몸과 같은 부드러움이 있다. 아키텍에 담긴 섹시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남자가 아니다. 제아무리 거친 마초라도 여자를 싫어하는 이는 없다.

기술이 실현할 수 있는 부드러움을 여성성으로 바꾸어 놓은 기발한 상상력. 아키텍에는 남성의 모습이 없다. 채 자라나지 않은 털을 몇 번씩 더 문지르게 된다. 과거 내 볼에 닿았던 여자 면도사의 따스한 손길의 감촉을 잊지 못한 탓이다. 아키텍은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돼야 하는지의 해답이다.]


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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