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부끄러웠던 한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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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 해가 저물어간다.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 많았던 한 해였다.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여 처리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실행한 젊은이들이 있었는가 하면,하루에도 수만명이 태평하게 이용하는 큰 다리가 중간에서 뚝 끊겨 차가 물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일도 있었고,도시 한복판에서 가스가 터져 영화에서나 보았 던 엄청난 불길에 사람이 죽고 많은 집이 타기도 했다.그리고 전국에서 적지않은 공무원들이 국민이 낸 세금을 가리지 않고 도둑질한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작년에는 배가 가라앉고,비행기가 떨어지고,기차가 탈선했었다.
이제 사람들은 쑥덕이기를 남은 것은 지하철 뿐이라고 한다.이러한 불안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신문을 보면 지하철도 어지간히 엉망인 듯하다.
도대체 어째서 이 꼴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하는 끔찍한 일들이다.우리들이 나날이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생활 기초가허술함을 이보다 더 잘 알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말로는 국제화(國際化)니 세계화(世界化)니 하는데 이러한 사건들 모두는국제적으로,세계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오늘날은 각자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자기 스스로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의존하는 세상이다.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 일을 허술하게 처리하면 반드시 다른 누구에게 해를 끼치게마련이다.
이와 같은 엄청난 상호의존성(相互依存性)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한 나라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도그러하다.그러므로 부끄럽고 어이없는 이러한 일이 연달아 터지는나라에서 온 사람은 아마 어디를 가도 제대로 대접받기를 기대할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곧 두 조각이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느냐 하면 전혀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이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 백성들의생활은 이런 생각,저런 느낌을 남기면서 예전과 별로 다른것 없이 그냥 그렇게 진행된다.
경찰관은 도둑을 잡아들이고,싸움을 말리고,여전히 뇌물을 받는다.택시운전사는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면서 교묘한 운전솜씨를 자랑하고,가능하면 합승도 시킨다.그리고 불안한 한강다리를 하루에도 여러번씩 잘도 넘는다.
이런 기회에 목청을 높이는 사람도 있다.그들은 걸핏하면 총체적위기(總體的危機)라고 부르짖는다.마치 이 사회 전부를 세탁기에 집어넣고 오래 빨아내야 할 것처럼,이 사회에「가득차 있는」적당주의.기회주의.배금(拜金)주의,또 무슨 주의를 허다하게 욕한다. 이 제도를 바꾸고,저 법률을 뜯어고쳐야 할 뿐만 아니라나아가서는 사람들의「사고방식」과「행동양식」이 통째로 달라져야 한다고 한다.마치 사고방식 등이 자동차 부속품과 같은 것이어서,고장난 것을 빼내고 새 것을 끼우면 만사가 해결되기 나 하는것처럼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잠시 엄숙해지기는 한다.스스로를 반성하고 다 바꿔야 한다는데,그러나 사람은 현재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살 수는 없는 존재여서 그러한「총체적 반성」이란 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훈계들은 사람을 주눅들게 하고 또 해결되지 아니한 것을 해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 사람의 의식을 마취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해로운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독일(獨逸)이 2차대전에서 패망한 후에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침착 또는 태연(Gelassenheit)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그것은 본 것을 보지 못한 척 하라거나 감수성을 죽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 다.오히려 바깥의 사태가 격동하고 때로 절망적일수록 그 사태를 객관적으로관찰하고 그것을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숙고하는 꾸준한 정신의 온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이 위태롭고 바탕없는 사회에서 과연 누가 그러한 침착함과 태연함 을 가지고 있을까.실로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인 것이다.
***모두의 침착함이 필요 이제 한 해가 저물어 간다.내년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그러나 아마도 그것은단순한 희망에 그치게 될 것이다.그러한 일은 어느 한 사람의 한 순간의 실수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바로 우리들 모두의 어떠한 궁핍이 지은 바고 그 궁핍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大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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