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서 5천만원 장학금 내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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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에 남아 있던 빚을 조금 갚았을 뿐입니다."

지난 12일 경기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35년 교직생활을 마무리한 민흥기(閔興基.65)씨가 퇴직금 일부를 제자들의 장학금으로 내놔 졸업생과 재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閔씨는 퇴임식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경기고 장학재단인 화동육영회에 5천만원을 내놓았다. 이 학교 55회 졸업생(1959년 졸업)인 閔씨가 장학금을 쾌척한 것은 고교 재학 시절 어려웠던 가정 형편이 4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閔씨는 여섯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는 몸이 허약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 집안이 어려웠다. 자신보다 열일곱살 많은 맏형이 박봉의 공무원 월급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閔씨가 경기중을 졸업할 무렵 가세는 점점 기울어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집간 누나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등학교는 나와야 한다"며 입학금을 마련해 준 덕분에 어렵사리 고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열두번의 공납금 가운데 입학할 때와 졸업 직전, 두번만 낼 수 있을 정도로 곤궁했다. 석달마다 공납금 마감일이 돌아오면 좌불안석이었으나 담임 선생님들은 모른 척하며 넘어갔다. 그는 방학 때면 아이스크림이나 옥수수를 팔아 살림에 보태야만 했다. 3학년 때 11월엔 졸업을 앞두고 담임 선생님께 간청해 학교에 나가지 않고 초등학생 과외를 해서 마지막 공납금을 마련했다.

"그때 내지 못한 공납금은 여태 마음속에 부채로 남아 있었어요."

閔씨가 진로를 사범대(서울대 지리교육과)로 정한 것도 수업료가 싸고 장학금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69년 서울 혜화여고를 시작으로 경복고.서울여고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서울영남중 교장을 거쳐 99년 모교 교장에 부임했다.

閔씨는 퇴임식에서 전교생에게 음악 CD 한장을 나눠줬다. 그가 평소 취미 삼아 부른 가곡 13곡을 담은 것이었다. 그는 30여년의 교직생활을 정리하며 '교육과 함께한 나의 길'이라는 책도 최근 출판했다.

"그동안 배출한 수많은 제자들이 있어 저는 누구보다 부자입니다. 행복합니다."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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