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통이 생기면 치아 이외에 내 몸의 모든 부분은 온전하게 잘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죠. 마찬가지로 삶이란 언제나 고통을 담고 있지만 그 순간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재미있고 신기한 것이더군요. 인생에 있어 불행은 몇 퍼센트 안될 텐데 거기에 집착해 나머지 아름다운 부분을 못 본다면 그게 더 큰 불행 아닐까요.”
기름 범벅된 태안 앞바다에서도 시인은 희망을 길어올렸다. “이런 추위에도 바지 걷어붙이고 갯벌로 달려간 사람이 수십만 명이라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미담의 주인공이 될 거에요.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자원을 많이 보유한 풍요로운 나라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이 나라는 참 괜찮은 나라에요.”
‘겨울나무와/바람/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나무도 바람도/혼자가 아닌 게 된다/혼자는 아니다/누구도 혼자는 아니다/나도 아니다/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보는 날도/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설일’ 부분)
시인은 대표적 송년시로 꼽히는 71년 작 ‘설일’을 인용하며 “살면 살수록 삶이란 참 좋은 것이라 그 자체에 정이 든다”고 말했다. ‘사랑의 시인’답게 그는 “한 해 동안 세파에 시달렸지만 다시 한번 가슴에 희망을 새기자”고 희망을 권했다.
# “시는 내 삶의 동행자”
그는 “시는 나와 함께 평생을 걸어온 동행자이자 나의 분신”이라며 “다작이나 화려한 수사에 대한 욕심 없이 경건하고 진솔하게, 쓰여질 때까지 쓰고 싶다”고 말했다. 등단 무렵 한국전쟁을 겪은 시인은 “사랑하는 가족과 저녁 식사 자리를 함께하고 뜨겁게 포옹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던 때가 있었다”며 “덕분에 평화의 가치와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시인의 낙관적인 인생관은 작품에 그대로 녹아있다. 그는 “삶의 아픔을 그리더라도 그 속에서 위로를 찾고자 했다”고 말했다.
시인은 문단의 원로로서 한창 성장 중인 신예들에 대한 관심도 늦추지 않았다. “우리 세대는 일본어로 교육받은 ‘한국어 독학 세대’인데 ‘선천적 한국어 학습 세대’인 요즘의 젊은 시인들은 언어 구사력이 대단해요. 지도처럼 세밀하고 감각적인 시를 써내더군요.” 동시에 그는 “일부 시인은 충격적이고 재미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경향도 보이는데 균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 “대권 주자라면 품격있는 수사학 갖춰야”
시인은 “이번 대선에서 원색적인 ‘말’의 공방을 보며 지쳤다”며 “앞으로 나서는 대권주자들은 품격있는 수사학을 갖췄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의 수장이라면 같은 말이라도 요리해서 듣기 거북하지 않게 해야지 생파, 생마늘 같은 말로 국민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어 이명박 당선자에게는 “국민들은 이에게 투자하는 마음으로 귀중한 한 표를 준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받은 감격을 좋은 소출로 돌려줬으면 한다. 우리 국민의 절박함과 상처를 다독여 줬으면 한다”고 당부의 말을 건넸다.
시인에게 새해 소망을 물었다. “마음에 고인 시상을 글로 옮겨낼 만한 체력을 허락받았으면 해요. 또 정겨운 우리 산하를 이곳저곳 제 발로 디뎌보고 싶기도 하고요. 2008년에는 대한민국이 더욱 밝아지고 젊어지고 사랑이 넘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모두의 지친 마음이 물 오르듯 풋풋한 새해의 기쁨으로 세례받길 기원합니다.”
이에스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