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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새로운 감각.발성에 빠져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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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에서 기획한 '오늘의 세계 시인' 시리즈로 두 권의 번역시집이 나왔다. 일본 시인 요시마스 고오조(吉增剛造.65.사진)의 시선집 '어느날 아침, 미쳐버리다'와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73) 시선집 '기억이 나를 본다'가 그것이다. 두 사람 모두 30년대생으로 우리나라에는 처음 소개되는 시인들이다.

'외국 번역시를 읽고 있는 느낌'이라는 말을 쓸 때가 있다. 번역투의 자연스럽지 못한 문장, 상투적인 시어의 남발, 그리고 작위적이고 산만한 상상력 혹은 이미지 구사 등을 염두에 두고 쓰는 말일 게다. 사실 번역시는 번역자의 타고난 언어감각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어쩌면 '종족의 방언'인 시는 번역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번역시를 읽는다. 거기에는 우리 시와 다른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 사람은 모두 꿈꾸는 방랑자라는 말과 좋은 시는 '종족의 방언'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면, 좋은(잘된) 번역시야말로 우리를 가장 먼 여행으로, 그리고 가장 순수한 시 읽기의 순간으로 안내해줄 수 있을 것이다.

고오조와 트란스트뢰메르의 언어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고오조가 분방한 화법과 형식으로 질주하며 비약하는 '무한의 언어'를 구사한다면, 트란스트뢰메르는 섬세한 은유와 면밀한 사유로 잘 짜인 '조감하는 언어'를 구사한다. 고오조가 격렬하고 현란한 언어 속에서 현대인의 분출하는 내면을 발견하고 있다면, 트란스트뢰메르는 삶과 역사에 대한 섬세한 통찰을 통해 고요한 시의 깊이를 발견하고 있다. 그러기에 '어느날 아침…', '기억이…'라는 시집 제목은 두 시인의 시적 태도를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두 시인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모더니스트답게 감각과 발성법이 새롭다. 모더니스트들이 주로 혹사시켰던 감각이 시각이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시인은 모두 '눈(眼)'과 '본다'는 행위에 집착한다. "나의 눈은 천 개의 검은 점으로 파열되어버려라/ 나의 눈은 천개의 성기로 찢겨져 떠돌아다녀라"('질주시편')에서처럼 고오조의 눈은, 마치 태풍의 눈과도 같이, 추락과 혼돈과 광기의 에너지를 거느리고 있다.

이에 비해 굴절 망원경, 잠망경, 망원경과 같은 시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 트란스트뢰메르의 눈은 현란하고 불투명한 이 현실을 조망하고 조감하고, 나아가 투명하게 제어하고자 한다. "시(詩)가 깨어 있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눈을 뜨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목포'), "일순 내가 빛난다! 거리가 나를 본다"('건널목')와 같은 구절에서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고오조가 "가랑잎이 구르는 소리와, 스페인어가 섞이어 아름답다"('로스앤젤레스'), "'티티'는 벼랑이 무너지는 소리와 이미지가 겹쳐 있다"('밀크')처럼 언어의 구체적인 질감과 이미지에 예민한 반면, 트란스트뢰메르는 "말로, 언어는 없고 말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지겨워"('1979년 삼월에'), "방수모(防水帽) 밑에서 언어가 시들어갔다"('얼굴을 맞대고')처럼 추상화된 언어에 주목한다. 개성화된 파롤의 목소리로 고오조가 "나는 시를 쓴다/ 첫 번째 줄을 쓴다/ 조각칼이 아침에 미쳐버려 일어선다/ 그것이 나의 정의다!"('어느 날 아침, 미쳐버리다')라고 일갈하고 있다면, 공준(公準)화된 랑그의 세계를 지향하는 트란스트뢰메르는 이렇게 나즉인다. "내가 투명해진다./ 내 속의 글이 보인다"('더 깊은 곳으로')라고.

정끝별 (시인.열린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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