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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47. 도널드 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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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60년대 중반 서울 명동의 어느 카페에서 만난 필자, 도널드 서, 작곡가 강석희씨(왼쪽부터).

1960년대에는 미국 음악학자들이 더러 한국에 와 국악을 연구했다. 이들은 대부분 나와 교류를 하고 돌아갔다.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음악학자이자 작곡가는 형제처럼 지냈던 ‘도널드 서’다. 나보다 한 살 위인 그와 서로 비밀이 없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그는 보통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버드대에서 작곡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른바 엘리트인 그는 유난히 여자를 좋아했다. 한국인 부모가 이민 간 하와이에서 낳은 그는 외모만 동양인 같았지 사고방식과 언어는 완전히 미국인이었다. 한국에 약 3년간 머물며 한국음악을 연구했는데 그간에 사귄 여자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황형, 나 이 여자에게는 정말로 반한 것 같아.” 이번에는 또 어떤 여자인가 싶어서 꼬치꼬치 물었다. 얘기인즉슨 자신이 머물고 있는 하숙집에 이 여자가 늘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창문 바로 밑에 있는 피아노를 밟고 방으로 내려온단다. 그 모습이 꼭 천사가 하강하는 것 같아 참으로 황홀하다는 것이 그가 반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질투심이 대단했는데 그 점이 특히 매력적이라고 했다.

 한번은 도널드 서가 다른 여자와 만난다는 사실이 들통났는데 그녀가 그의 방에 들어와서는 애써 작곡한 악보 수십 장을 완전히 찢어놨다는 것이다. 그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종이를 쫙쫙 찢는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어.”

 그리고 그는 비밀리에 주한 미국 대사관에 가서 그 여자와 혼인 신고를 했다. 나는 이 작곡가의 여성 취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 세계는 대단한 수준이었다.

 80년대 후반 그는 대작을 쓰기 시작했다. 1시간이 넘는 칸타타였다. 독창자 네 명과 대규모 합창단, 오르간,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함께 공연했다. 제목은 ‘노예문서(Slavery Documents)’. 89년 보스턴 심포니홀에서 이 곡을 초연한다는 편지를 받고 나와 아내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피땀 흘려 곡을 만들었던 과정을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곡은 과연 장대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보스턴 유력지인 ‘보스턴 글로브’에 실린 공연 평에 ‘눈물을 흘리면서 들었다’는 구절이 있었다.

 신문에 이런 감정적인 평이 나올 정도였다. 나와 아내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아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에게 “이런 공연을 한국에서도 꼭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간청했다. 문화부 후원으로 도널드 서와 초연 당시의 지휘자가 한국에 왔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이 공연엔 지휘자 정명훈씨까지 청중으로 찾아와 “감동적이었다”는 소감을 내놓기도 했다. 나는 99년 5월 독일 하노버에서 연주하던 중 도널드 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제처럼 지내면서 말할 수 없는 음악적 감동을 줬던 그가 그립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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