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위임·실용형 리더십’ 세종은 최고의 군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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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왕의 투쟁
함규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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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쪽, 1만5000원

권력자와 집권자.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를 지닌다. 권좌에는 올랐지만 권력을 잡지 못했을 때가 그렇다. 이는 조선의 왕들에게도 들어맞는 말이다. 만인지상의 절대권력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신하들과 끊임없는 권력투쟁을 해야 하는 위치였다. 군림과 통치를 해야 할 제왕이 신하들과 권력다툼을 하다니.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그게 현실이었다.

최근 나온 역사책들은 대개 조선의 권력사를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결 구도로 본다. 성리학을 추종하던 조선의 신하들이 금과옥조로 삼은 것은 왕도정치였다. 이는 신권을 정당화시킨 명분이 됐다. 왕이 도를 지키지 못하면 신하가 군주를 바꿀 수 있다는 ‘택군(擇君)’의 논리도 여기에서 나왔다. 왕에겐 강력한 위협이었다.

따라서 성리학적 명분을 내세워 권력을 행사하려는 신권 세력과, 이를 통제하고 왕권을 확보하려는 임금의 대결은 그야말로 마키아벨리즘적 권력투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수록 이름만 왕조였을 뿐 실은 신하들이 권력을 쥐락펴락했다는 게 많은 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포토일러스트=이정권 기자

그렇다면 왕은 집권자일뿐 진정한 권력자가 되지는 못했던 셈이다. 책은 이 괴리 현상에서 비롯된 왕과 신하들의 긴장관계를 권력투쟁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특히 지은이는 명군(名君)으로 칭송 받는 세종과 정조, 폭군으로 낙인 찍힌 연산군과 광해군을 비교하면서 일관된 논리를 전개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세종조차 말년에 내불당 건설을 둘러싸고 신하들과 격렬한 대립을 벌였다고 한다. 왕과 신하가 거의 계급장 떼고 막말을 하는가 하면, 단식투쟁까지 불사했다는 것이다. 성군 세종이 그럴 정도였으니 신하들에게 약점 잡힌 다른 왕들은 어떤 처지였는지 상상이 간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었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또 어렵사리 그 자리에 올라선 이후에도 신하나 외척에 맞서 고독한 사투를 벌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왕의 생애를 ‘권력투쟁의 연속’이었다고 규정한다.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암투의 대상이 되고, 세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 왕위에 오르느냐 못 오르느냐를 놓고 칼부림과 피바람이 일기도 했다는 점으로 미뤄 일리 있는 설명이다. 저자는 연산군과 광해군의 폭정도 개인적 광기와 함께 왕권과 신권 간의 항쟁 차원에서도 비중 있게 바라본다.

책은 크게 두 편으로 나뉜다. 전편에선 4명의 왕의 권력투쟁을 에피소드 중심으로 소개하는 데 이어 후편에선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라는 틀에 맞춰 시대를 넘나들며 정치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한 발 더 나아가 후편에서는 현대 정치에 대한 시사점을 이끌어 내려 한다. 새 통치 리더십이 등장한 시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인 셈이다.

예컨대 측근정치의 위험을 다룬 대목이 그렇다. 저자는 세종을 빼고는 모든 왕들이 측근을 두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이첨을 싸고 돈 광해군은 물론이고, 개혁군주 정조도 한동안 홍국영을 내세워 측근정치를 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최고 지도자가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은 공식적인 조직 구도를 넘어서 자기 세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를 두고 지은이는 신권과의 투쟁 과정에서 왕에게 이너 써클이나 친위대는 어느 정도 불가피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론 측근정치가 조직의 비효율과 지휘계통의 왜곡을 부르는 법이다. 비선 조직이 정규 지휘 계통을 넘나들면 일이 잘 될 수가 없다. 주요 포스트의 인선을 앞둔 새 리더십에겐 중요한 지침이 될법하다.

리더십의 스타일과 방향성도 중요한 이슈다. 저자는 역시 세종을 조선 최고의 리더십으로 평가한다. 세종은 행정업무를 재상들에게 과감히 위임했다. 그 결과 최고 결정권자에겐 여유가 생겼고 세종은 이를 혁신 프로젝트에 투자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과학기술 발명 등 세종의 치적으로 평가 받는 일들은 그런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저자의 분류에 따르면 세종은 위임형이자 실용형 리더십이다.

저자는 강력한 왕권이나 비대한 신권,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며 갈등적 파트너십을 유지하되 공존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결론짓는다.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인 저자는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현대적 표현을 써가며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역사책을 쉽게 풀어냈다. 다만 논리를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려다 보니 가끔 이래야 했다, 저래야 했다는 식의 주관을 강하게 내세운 것은 ‘오버’로 비친다.

남윤호 기자, 포토일러스트=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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