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길 떠나는 영화 ③ - 웨스 앤더슨의 <다즐링 주식회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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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형제들의 인도 순례기- 웨스 앤더슨의 <다즐링 주식회사>

온 마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랑의 열병이 20대만의 감수성이 아닌 것처럼 방황에도 어떤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방황은 도통 끝이 없다. 철모르는 20대엔 서른 살이 넘으면 무언가 내 인생의 지도를 완성해 놨을 거라 믿고 살았다. 그러나 이건 정말 막연하고 어수룩한 생각이었다. 서른 살이 되기 전 날, 그러니까 ‘29년 12개월 31일’을 산 나는 놀랍게도 통장에 고작 몇 천원이 남아 있는 신세였다. 심지어 백수 상태로 놀고 있었기에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현재마저 없었다. 그나마 통장에 남은 몇 천원을 빼서 쓰고 싶어도 만 원을 만들지 못해서 무기력하게 쳐다만 보는 정도였다. 이쯤 되면 누구나 축 처지기 마련이다. 사실 두 어깨보다 더 움츠러진 영혼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무엇을 해봐도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남아도는 나날들이었다. 아아, 아침 태양은 왜 이리 밝게 떠오르는지!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음의 방황을 발에게 맡기는 일이었다. 걷고, 또 걷고, 시간을 걸음으로 치환하며 살다보니 이상한 삶의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이젠 시간을 경제적 효용가치로 바꾸어야겠다는 생각 말이다. 루소가 <에밀>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첫 철학 스승은 우리 발”이라는 걸 몸소 깨달았다. 내 작은 삶에 있어서 성스러운 장소를 향해 떠나는 것만이 결코 순례가 아니었다. 하루하루 깨달음의 발걸음을 내밀 수 있다면 그보다 충만한 삶이 또 있겠는가!

웨스 앤더슨이 이번엔 우리를 인도행 열차로 초대한다. 달콤한 스위트 라임을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기차 여행이야말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도시인들의 로망이다. 이런 낭만을 담은 <다즐링 주식회사>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하기 위해, 수녀가 된 어머니를 찾아가는 삼형제의 이야기다. 큰형 프랜시스(오웬 윌슨)는 동생들과의 특별한 인도 여행을 계기로 다시 형제애가 예전처럼 돈독해질 것을 꿈꾼다. 그러나 사고뭉치 형제들의 다툼 때문에 이 여행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흔히 이들은 콩가루 집안의 루저(loser) 삼형제로 비추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결코 얼간이나 머저리(nerd)가 아니다. 도리어 누구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친구들이다. 앤더슨 영화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항상 결핍에 시달린다. 어린 시절의 영특함마저 잃어버리고, 너무 평범한 성인이 되어버린 이들이 그의 영화에 주축을 이룬다. 프랜시스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심한 상처를 받았던 괴짜 테넨바움 패밀리(<로얄 테넨바움>)와 다를 바가 없다. 아내의 임신 소식에 부담을 느끼는 피터(애드리언 브로디)와 병적인 여성편력을 가진 잭(제이슨 슈오라츠먼)은 마치 테넨바움 패밀리의 외전 같다. 1950~1960년대 아우라를 풍기는 웨스 앤더슨의 캐릭터들은 J.D. 샐린저 소설에 등장하는 청춘들과도 맞닿아있다.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들>처럼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일상부터 <프래니와 주이>에서 보여주는 젊음의 연약함에 이르기까지, 삶의 날카로운 통찰과 유머가 인생의 결에 담겨 있다. 앤더슨의 청춘 캐릭터들은 샐린저 풍으로 “무엇보다 좋은 건 그가 웃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는 그냥 우스운 사람이었던 거지.”라고 언제나 읊조릴 거 같은 분위기다. 특히 <로얄 테넨바움>은 <프래니와 주이>와 정서적으로 하나의 영혼으로 이어져 있다. 예민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형제 프래니와 주이는 좌절하고, 방황하고, 상처받는 청춘의 특권을 톡톡히 누린다. 샐린저 자신이 비밀스럽고 은둔자로 생활했던 것처럼, 웨스 앤더슨 역시 젊음의 자화상을 은밀한 색깔로 덧칠해 나간다.

웨스 앤더슨의 <다즐링 주식회사>는 전작 <로얄 테넨바움><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과 연속선상에 있는 영화다. 앤더슨 사단이 다시 모였다는 점에서 <로얄 테넌바움>의 재구성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즐링 주식회사>는 한편으로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의 데칼코마니이자, 아버지의 법을 경유함으로써 얻어진 성과물이다. 즉 아들은 더 이상 아버지가 필요 없다. 어느새 철없던 아들도 자라 아버지 세대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빔 벤더스의 <도시의 앨리스>에서 아버지를 잃은 젊은 세대가 아이(미래의 세대)와 함께 동독과 서독으로 나뉜 조국을 여행하며, 어느새 아버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재미있는 것은 불혹의 나이를 앞둔 앤더슨조차 ‘아버지의 이름’을 스스로 떨쳐버린다는 사실이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에서 지소(빌 머레이)의 아들 네드로 나왔던 오웬 윌슨이 이번엔 인도여행을 주동하는 큰 아들로 나온다. 아버지 지소가 벨라폰테 호로 해적의 꿈을 아들에게 심어 준과는 달리, 아들 프랜시스는 아버지 없이 다즐링 리미티드(기차여행)로 인도의 신비를 경험한다. 영화의 오프닝은 비즈니스맨으로 우정 출연한 빌 머레이가 기차에 탑승하지 못하고, 간신히 달리기가 되는 아들들만 올라타는 걸 보여준다. 다즐링 여행에 아버지 세대가 제외되었음을 은근 슬쩍 가르쳐주는 것이다. 아버지의 법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는 아들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일종의 선언이다. 물론 이 형제들이 아버지의 유산인 루이뷔통 가방을 마음껏 던져버리고, 다시 기차여행을 떠나는 엔딩에 이르러서야 그 의미를 스스로 깨닫는다.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도의 수녀가 된 어머니 패트리샤(안젤리카 휴스턴)는 “다음 날, 이야기하자”고 말해 놓고 조용히 사라져버린다.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어떤 미래를 열어주지 않고, 순례를 떠남으로써 그들이 직접 자신의 길을 펼치도록 만들어준다.

다즐링 여행의 묘미는 기차 안의 시간과 정지된 시간(혹은 유예된 시간)이 두 축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형제들이 기차에 쫓겨나 아이들을 구하고, 어머니를 만나는 여행은 정지된 순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측 불가능한 우연성에 기꺼이 몸을 맡기는 ‘사건의 시간’이다. 자신이 걷는 길이 자신을 고귀한 의미에 눈뜨게 해주기를 바란다는 차원에서 순례의 길이 된다. 이것은 일상에서 찾을 수 없는 초월성의 경험이다. 늘 자신의 영혼을 찾는 여행은 그 자체가 시행착오이기 마련이다. 프랜시스 형제들이 인도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방황은 성지에 이르는 하나의 긴 과정을 따른다. 이 시간이 의미 있는 것은 자신조차 등한시했던 ‘나의 또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기차의 시간은 흔히 발전과 진보를 상징하는 미래의 시간이다. 보통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어울리는 속도의 시간대를 상징하지만, 느긋하고 낭만적인 다즐링 열차는 그런 시간으로 함몰되지 않는다. 이들은 한가로이 스위트 라임과 담배 한 모금을 즐길 수 있기에 ‘치유의 시간’으로 작동한다. 달달달 거리며 달리는 다즐링은 발육부진과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을 형제애로 다시 가다듬어 준다. 세상의 근심을 모두 떨쳐버리고 나를 찾아 떠나는 기차놀이, 이토록 아름다운 인도 여행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글_전종혁 프리미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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