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스페어' 아닌 '페이스메이커'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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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후보가 19일 밤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서울 남대문로 단암빌딩 선거상황실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강정현 기자]

이회창 무소속 후보가 세 번째 눈물을 흘렸다. 1997년, 2002년에 이어 2007년 대권은 또다시 그를 외면했다. 4년여간의 정계 은퇴 시절을 접고 지난달 7일 무소속 출마 선언을 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험난한 가시밭길을 가고자 한다. 반드시 정권 교체를 이루기 위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 무너진 이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이 길이 내가 갈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는 18일 밤 명동 마지막 유세에서 "마지막 도전이다. 자신 있다. 일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호소, 기대는 끝내 외면당했다. 두 차례 대선에서 1000만 표 안팎의 표를 줬던 국민은 이번엔 350만 표 안팎으로 줄었다. 그는 중앙선관위로부터 기탁금(5억원)과 선거비용을 전액 보전 받느냐(득표율 15% 이상), 반액만 받느냐(10~15%) 걱정할 처지가 됐다.

사실 그는 보수 진영이 배출한 최고의 엘리트란 평가를 들었다. 대법관-중앙선관위원장-감사원장-국무총리-두 차례 한나라당 대선 후보라는 최고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왜 실패했을까. 그는 요즘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말하곤 한다. 정치권에선 그러나 "버리지 말아야 할 것까지 버렸다"고 평가한다. 바로 명분이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창당한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당 경선 과정에서 선출된 적법한 후보가 불안하다는 게 이유였다. 한나라당은 "경선을 우회한 새치기 출마다" "사실상 경선 불복이다"란 비판을 쏟아냈다.

두 차례 대선에서 네거티브 때문에 패배했다고 믿는 그는 이명박 당선자에게 쏟아질 의혹 공세를 과대평가했다. 그는 "내 출마와 BBK와는 관련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 캠프는 선거운동 마지막 날까지 BBK 공세를 폈다.

이 후보는 연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JP(김종필)와의 연대 실패가 충청권 패배로 이어져 결국 대선에서 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실했던 박근혜 전 대표의 마음을 사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과거 대선 길목에서 껄끄러웠던 YS(김영삼)와 JP, 정몽준 의원이 모두 이명박 당선자를 돕는 '불운'을 겪었다. 정 의원은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후보 단일화를 해 앞서 가던 이회창 후보에게 패배를 안겼다.

이회창 후보의 대권 꿈은 끝났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대선 패배가 분명해진 19일 오후 8시20분 선거상황실에서 "기회의 균등, 법치와 공정, 정직과 신뢰의 가치가 바로 선 반듯한 대한민국을 꼭 만들고 싶다"며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이 길을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출마를 놓고 이명박 당선자의 낙마에 대비한 '스페어 후보'냐, 보수의 흥행을 위한 '페이스메이커 후보'냐 하는 논란이 있었다. 그는 완주했다. 결과적으로 스페어 후보는 아니었다.

대신 그의 출마로 보수 지지층은 두터워졌다. 그가 충청권에서 강세를 보이면서 범여권의 필승 구도인 '호충(호남-충청 연대)' 구도가 불가능해졌다. 정치권에선 이 후보의 출마가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이명박 당선자를 돕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본다. 페이스메이커였다고 볼 수 있다. 그로선 보수 분열의 책임론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게 된 셈이다. 그가 홀가분해 보이는 이유다.

글=고정애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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