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칼럼

집단 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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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번 선거운동 과정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어느 수준 이상을 줄기차게 유지한 것이다. 이 후보 측이 선거운동을 더 열심히 한 것도, 돈을 더 쓴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도곡동 땅에서부터 BBK에 이르기까지 그 개인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지지율이 높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여당 인사들이 “국민이 노망 들었다” “이상한 나라가 됐다”고 불평할 만도 하다. 그렇다면 왜 40%대의 지지율이 유지돼 왔을까. 이명박 개인이 잘나서일까?

곤충이나 동물들조차도 생존을 위해 집단적 판단을 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엘리트주의자들은 대중이란 몇몇 엘리트가 끌고 가는 대로 따라오는 수동적 집단이라고 믿고 있다. 이는 좌나 우를 막론하고 엘리트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현 좌파 집권 세력은 민심을 뒤엎기 위해 끊임없이 정치공학적 시도를 했다. 반면 보수 엘리트주의자들은 그런 공작으로 민심이 뒤집힐 것을 계속 우려했다. 남북 정상회담이 그 예다. 그러나 민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민심은 바로 ‘집단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싶다. 엘리트들이 아무리 흔들고 싶어도 흔들리지 않는 민중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떤 것, 이것을 다른 말로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 국민은 지혜로웠다. 해방 후 60년 만에 세계 꼴찌군의 국가에서 11위로 올라서게 만든 힘도 바로 이런 집단적 지혜였다. 열심히 일해야 할 때는 일을 했고, 민주주의를 해야 할 때는 민주주의를 성취시켰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등장도 이런 집단적 지혜의 결과라고 믿고 싶다. 보수 쪽에서는 이 두 사람이 못마땅하겠지만 이 두 사람의 시대가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올 수 없었다. 호남의 한은 반드시 풀고 가야 할 짐이었고, 보수의 부패, 기득권의 횡포도 청산하고 갈 문제였다. 두 대통령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더 깊어진 갈등의 짐으로 지금쯤 우리는 오도 가도 못 할 지경에 이르렀을지 모른다. 집단적 지혜는 이런 문제를 이미 판단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이런 부담을 비교적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집단의 지혜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고통을 겪은 민족의 경험이 지혜로 바뀌었나? 우리 국민의 교육열이 만들어 낸 이성의 힘일까? 아니 하늘이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모두의 가슴속에 나눠 준 영혼의 힘일 수도 있겠다. 아무런들 이 집단의 지혜가 있는 한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다. 투표를 코앞에 두고 BBK를 둘러싼 새 폭로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혼돈이다. 집단 지혜는 이런 기막힌 상황에 절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이미 결심했을 것이다.

내일이면 새 대통령이 뽑힌다. 누가 새 대통령이 되든 걱정이 없다. 혹시 당선자 스스로가 잘나서, 능력이 출중해서 당선된 것으로 착각하고 금방 군림하는 자세로 표변할 수도 있다. 3개월 반 뒤면 총선이 있다. 그럴 경우 집단 지혜는 새 대통령을 견제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잠시 쓰임 받은 도구”로 자임하고 고개를 숙인다면 일할 수 있도록 밀어주면 된다. 특검이 당선자의 앞길을 험난하게 만들 수도 있다. 혹시 대선을 다시 치르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두려 울게 없다. 우리의 집단 지혜가 바른 판단을 해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문창극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