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즐거운천자문] 내일 밤엔 누가 진이 될까요 … 당신이 심사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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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아름다운 꽃 진선미 보란 듯이 피었네.”

2001년까지만 해도 매년 봄에 한번은 지상파 TV에서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걸치고 대부분 사자머리를 한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우아한’ 미소를 날리며 합창하던 노래다. 평소에 잘 안 웃던 처녀들이 그 무대에 선 뒤엔 한동안 안면근육이 마비된다는 소문도 들렸다.

“누가 진이 됐으면 좋겠습니까?”라며 최후의 두 미인에게 묻던 아나운서의 얄궂은 질문도 이제는 아스라해졌다. 얄밉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솔직한 답변을 말하기가 수월치 않았을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시간을 끌기 위한 질문이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시청률이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리기 때문이다.

‘쟤는 왜 나왔지’ 하면서도 시청자는 화면을 주시했다. 부모가 왜 말리지 않았을까 싶은 후보가 여럿 있었다. 하기야 자신을 몰라도 상당히 모르는 후보자가 훨씬 더 많았다. 드디어 미스코리아 진을 발표하는 순간 시청률은 주중 최고를 기록한다.

진도 울고 선도 운다. 진은 감격해서 울고 선은 억울해서 운다. 그 와중에도 미용실 원장에게 감사의 말을 빼놓지 않던 최고 미녀의 속사정을 시청자는 너그러이 받아주었다. 그해 1등 미인으로 당선된 여성의 행진을 끝으로 5월의 TV 축제는 마감되곤 했다.

방송사의 전화가 불 나는 건 그 순간부터다. 어느 심사위원이 수상하다, 그 여자는 누구 딸이다, 어디를 고쳤다, 성형외과 이름부터 산부인과 이름까지 죽 나열된다. 물론 네티즌 마을이 생기기 전 이야기다. 이런 풍속이 사라진 배경엔 여성단체들의 ‘투쟁’ 기록이 있다. 방송사 앞에 진을 치고 ‘성의 상품화’와 외모지상주의의 폐해를 온몸으로 외쳤다. 미인의 눈물을 케이블로 옮긴 건 순전히 그들의 힘이다.

지상파 TV에서 사라질 운명에 놓인 눈물이 또 있다. 그해의 ‘가수왕’이 박자까지 놓치며 눈물의 앙코르를 부르는 장면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연말 가요대전이 올해부터 일제히 종적을 감추게 됐기 때문이다. 시청률이 낮게 나와서가 아니다. 권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진짜 실력자는 상을 거부하고, 오히려 반성해야 마땅할 사람끼리 상을 주고받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런 행사는 막는 게 당연하다.

올해 가장 화제가 된 그림은 팝아트의 대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었다. 미술학도는 그림의 가치에 놀랐고, 서민들은 그림 가격에 놀랐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은 살아오면서 스스로 흘린 ‘행복한 눈물’의 순간들을 비스듬히 헤아려 보았을지 모른다.

내일 밤 시청자는 TV에서 또 몇 명의 눈물을 보게 될 것이다. 5년 만에 한 번씩 보게 되는 장면이다. 누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고 누구는 울분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누가 진이 됐으면 좋겠습니까?” 그 주인공을 가리는 심사위원들은 오늘밤 더 신중해져야 한다.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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