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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기타로 심금 울리는 집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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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12면

1980년대를 장식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그 다음의 글로리아 에스테, 세기말이었던 99년에 쏟아져 나온 미끈했던 리키 마틴, 배우활동도 겸한 제니퍼 로페즈 그리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등은 영미 음악과는 색조가 다른 라틴 팝으로 유명한 가수들이다.

라틴 팝의 원조 호세 펠리치아노

이제는 미국에서 흑인보다 인종비가 높은 히스패닉계의 음악이라 할 중남미의 라틴 팝은 이미 50년대에 국내에도 번안되어 애청된 곡 ‘베사메무초’ ‘키엔 세라’가 말해주듯 특유의 낭만적인 리듬과 애조 띤 멜로디를 생명으로 구미사회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인기를 누려왔다.

라틴 팝 하면 위에 든 이름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원조는 그들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60년대 후반 미국시장을 강타한 시각장애인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62·Jose Feliciano)라고 할 수 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길거리 스피커와 라디오 전파를 뒤덮는 곡 ‘펠리스 나비다드’(Feliz Navidad-‘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뜻)를 부른 주인공이 바로 호세 펠리치아노다. 이 곡 말고도 그는 국내에서 ‘한때 사랑이 있었지(Once there was a love)’와 ‘집시(The gypsy)’ ‘레인(Rain)’ ‘케 사라(Che sara)’ ‘네이처 보이(Nature boy)’와 같은 골든 팝송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이 노래 대부분은 국내에서는 절대적인 호응을 누렸지만 본고장 팝 팬이 기억하는 곡들은 아니다. ‘레인’의 경우도 빌보드 차트에서 76위에 그쳤다. 심지어 외국에서는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앨범의 수록곡 가운데 우리 정서에 맞는 것을 당대의 음악다방과 라디오의 디스크자키들이 골라내 인구에 회자시켰다. 말하자면 ‘한국적 팝송’이다. 디제이들이 이 곡들을 숨겨진 보물 찾듯이 발굴한 데는 ‘애조 띤 멜로디와 낭랑한 어쿠스틱 기타 음을 우리 팝 팬이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했을 것이다.

독창적 개조로 인기 끈 리메이크의 왕
그럼 미국에서는 어떤 곡이 사랑받았을까. 그는 음악계에 데뷔한 68년부터 다른 가수 곡을 특유의 감성으로 놀랍게 바꿔낸 ‘리메이크’ 노래로 명성을 떨쳤다. 록그룹 도어스(Doors)가 67년 발표한 명곡 ‘내 불을 밝혀라(Light my fire)’를 재해석한 곡의 질감은 원곡과는 영 딴판이었다.

능란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바탕으로 로맨틱하면서도 클라이맥스에서 솟아오르며 사정없이 뿌려대는 보컬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넘어 기겁했을 정도였다. 도어스의 곡과 다르기로 따지면 거의 환골탈태 아니면 둔갑 수준. 사이키델릭 곡이 단숨에 라틴 팝이 되어 나온 것이다.

호세 펠리치아노의 ‘내 불을 밝혀라’는 리메이크임에도 불구하고 전미차트 3위에 오르며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음악 팬들이 원작의 단순 재해석이 아닌 호세 펠리치아노 그만의 독창적 개조로 받아들인, 다시 말하면 그의 독자적 표현세계를 인정해준 덕이었다. 지금도 호세 펠리치아노의 ‘내 불을 밝혀라’는 팝 역사상 가장 득의에 찬 리메이크 곡으로 꼽힌다.

국내 팝 팬들은 마찬가지 이유로 마마스 앤드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이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수지 큐(Susie Q)’ 그리고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인 ‘케 사라’ 등을 호세 펠리치아노의 독창적인 버전으로 즐겨 들었다.

이번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도 관객은 비틀스의 ‘예스터데이’,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 등 익히 알려진 유명 팝송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주조해내는 호세 펠리치아노의 노래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호세 펠리치아노가 이처럼 리메이크 노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티스트와 뮤지션으로 융숭하게 대접받는 것은 리메이크가 새로운 창조임을 웅변해냈기 때문이다.

장애 이겨낸 어쿠스틱 기타의 전설
1945년 푸에르토리코 생인 그의 주특기는 호소력 있는 얇은 고음의 보컬 외에 낭랑한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이다. 선천성 녹내장으로 앞을 볼 수 없는 고난을 타고난 재능과 하루 14시간씩 연습하는 노력으로 이겨내고 빼어난 기타연주자로 거듭났다. 40년 넘게 어쿠스틱 기타 분야의 전설로 숭앙받으며 지금도 라틴 음악에 관한 한 ‘일렉트릭 기타는 산타나, 어쿠스틱 기타는 호세 펠리치아노’라는 인식을 확립했다.

2000년대에도 그는 계속되는 월드투어를 통해 팬들에게 라틴 음악의 로맨티시즘을 전달하는 동시에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신보를 발표해 현재진행형 뮤지션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음악에 대한 헌신’과 ‘음악을 향한 열정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감동이 배가된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그는 재능과 노력, 그리고 낙천적인 사고로써 예술가의 전형을 확립했다.

우리가 너무도 좋아했던 곡 ‘집시’의 가사에서 그의 음악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난 노래를 연주하고 음반을 만들어 돈을 받는 그런 집시죠/ 난 순회하는 무리의 일부예요/ 난 온 땅을 돌아다니죠/ 내 동료를 위해 곡을 만들어주고/ 슬프고 때로는 행복한 음으로 모든 곡을 쓰고 연주해요/ 어떤 곡은 사람들을 웃기고/ 어떤 곡은 사람들을 울리죠/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난 끝없이 음악 여행을 계속해요/ 내 기타가 낡고 쉬 고되더라도….”

이번 내한공연에서 팬들은 그가 남긴 무수한 추억의 골든 팝, 공연장에 울림을 가져다줄 상쾌한 보컬, 그리고 라틴 기타 연주의 환상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진정한 뮤지션이 전하는 헌신과 즐거움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라틴 팝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호세 펠리치아노의 재능과 존재감을 넘어설 인물은 없다. 우리는 세기말에 유행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쏟아진 라틴 팝가수들이 아닌, 그보다 훨씬 전에 등장한 호세 펠리치아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임진모씨는 일간지 음악담당 기자를 거친 뒤 팝칼럼니스트이자 방송진행자로 활동하는 음악평론가로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 『젊음의 코드, 록』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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