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세계화와 아시아적 가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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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6면

AFP 본사 특약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라는 표현은 과거와 현재 사이 못지않은 간격이 동서양 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1990년대에는 서양의 가치체계와 이질적인 ‘아시아적 가치’ 때문에 아시아는 정치ㆍ경제적으로 서양과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주장이 말레이시아ㆍ싱가포르ㆍ인도ㆍ일본 등지에서 대두했다. 아시아적 가치란 ‘개인의 자유나 인권보다 공동체의 화합과 번영을 더 중시하는 것’이다. 아시아인들이 중시하는 가치가 서구인들과 다르고, 따라서 아시아적 발전의 길 역시 서구와 다르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아시아 공통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아시아적 가치를 핑계로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세계적인 신학자 한스 큉은 아시아 공통의 종교ㆍ윤리는 분명 존재하지만, 자세히 평가해 보면 유럽ㆍ중동ㆍ인도 등의 종교ㆍ윤리와 공통점이 더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편집자>

한스 큉 신학자ㆍ지구윤리재단 회장

많은 유럽인들은 아시아가 유럽 수준의 지역 통합을 이뤄내기 힘들다고 본다. 그러나 아시아는 유럽 통합에 크게 기여한 안정성 있는 공통의 윤리적 기반뿐만 아니라 고도로 발달한 도덕 원칙들을 구비하고 있다. 아시아의 도덕적 원칙 중 일부는 비슷한 원칙이 유럽에서 자리 잡기 훨씬 이전에 확립됐다. 더 나아가 아시아적 원칙들은 전 세계 공통의 윤리 원칙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물론 아시아에는 아직 응집력 있는 공통의 핵심 문화가 없다. 유럽에는 유대교ㆍ그리스도교 전통과 계몽주의라는 탄탄한 문화적 바탕이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지나치게 교만에 빠지면 안 된다. 최근 유럽 공동의 문화가 취약성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특히 부시 행정부의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정책으로 유럽은 친미적인 ‘신(新)유럽’과 그렇지 않은 ‘구(舊)유럽’으로 편이 갈리게 됐다. 거짓을 바탕으로 한 이라크 침공은 그리스도교와 서양의 가치체계를 손상시켰다. 이는 2001년 9월 11일의 비인간적 테러 공격이 이슬람교에 대한 믿음을 훼손한 것과 마찬가지다.

아시아에는 유럽과 달리 문화적 중핵(中核)은 없다. 그러나 아시아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공통의 윤리적 기반은 있다. 또한 여러 면에서 아시아는 시대의 대세인 다문화(多文化) 전통이 유럽보다 역사적으로 강하다.

기원전 3세기부터 불교는 인도에서 출발해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평화적으로 퍼져나갔다. 1세기에도 불교는 전진을 계속했다. 비단길을 따라 중앙아시아와 중국으로 전파됐으며 수세기 후에는 결국 한국과 일본에까지 도달했다. 아시아에서 종교들은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서로 섞이기도 한다. 이슬람은 주로 정복을 매개로 중동ㆍ인도ㆍ북아프리카 등지로 전파됐다. 그러나 이슬람은 상인ㆍ학자ㆍ구도자의 발길을 따라 대체로 평화적으로 동남아시아로 퍼져나갔다.

중국에서는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역사적ㆍ윤리적 휴머니즘이 발아하기도 했다. 유럽의 ‘후마눔(humanum· 인간됨)’에 해당하는 인(仁)은 오늘날에도 중국 문화 전통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다.

공자는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라(己所不慾 勿施於人)”고 설파하며 황금률(黃金律)의 호혜주의(互惠主義)를 정립했다. 한자의 확산을 통해 인(仁)의 개념과 황금률은 중앙아시아와 대만, 한국과 싱가포르까지 중국의 영향을 받는 광대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황금률은 인도 전통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자이나교에서는 “사람은 자기가 대접받기를 바라는 대로 모든 생물을 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경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게 즐겁지 않은 상태는 다른 이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내게 즐겁지 않은 것을 어찌 다른 이에게 행할 것인가.” 힌두교에서도 이렇게 단언했다. “내게 행해진다면 내가 고통을 느낄 방식으로 남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도덕의 핵심이다.”

이 황금률은 물론 아브라함의 종교인 유대교ㆍ그리스도교ㆍ이슬람교에서도 발견된다. 랍비였던 힐렐(기원전 60년께)은 말했다. “네게 고통스러운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예수는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슬람교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자신 스스로를 위하는 만큼 형제를 위하지 않는 자는 아직 믿음이 없는 자다.”

세계의 여러 종교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인간다움의 원칙’이나 황금률에서 그치지 않는다. 요가의 창시자인 파탄잘리의 저술, 중국의 문화 전통, 계시 종교인 유대교ㆍ그리스도교ㆍ이슬람교 등에서는 다음 네 가지 구체적인 윤리 법칙을 공통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성(性)을 남용하지 말라.”

동서양 문화를 초월하는 이러한 윤리 규범들은 인류 공통의 윤리를 구성하는 구조적인 요소들이다. 모든 인류에 통용되는 윤리 규범의 존재는 ‘아시아적’ 가치와 ‘서구적’ 가치 간의 깊은 갈등에 대해 논하는 게 거의 쓸모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아시아가 아시아 공통의 윤리에 눈을 돌린다면 전혀 새로운 단결의 정신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아시아 윤리는 군사력이 아니라 문화와 이념에 기반한 ‘연성권력(soft power)’을 구사할 것이다. 그리고 적(敵)은 없고 오로지 경쟁자와 파트너만 있는 세상을 열어갈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시아는 진정으로 평화로운 신세계 질서를 수립하는 데 공헌할 것이며 문화 통합의 측면에서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시아의 프로젝트는 자연법 사상에 기초한 서구의 인권운동과는 다른 게 될 것이다. 세계의 여러 윤리ㆍ종교 전통은 각 문화적 토양에서 고유의 가치ㆍ규범ㆍ태도를 발전시켜 왔다. 상이한 점도 있다. 그러나 이들 윤리ㆍ종교 전통의 공통분모를 통합함으로써 비(非)종교인들도 지지할 수 있는 인류 공통의 가치체계가 수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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