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화재 속 배우들 "아 죽었구나" 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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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큰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다 나가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연기자 대기실에 시커먼 연기가 들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스로 대기실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제가 있던 3층 복도에 갑자기 정전이 되면서 비상구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 죽었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벽을 더듬어가면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하니 지금도 온몸이 덜덜 떨리네요.”

어제(12일) 발생한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화재 당시 오페라‘라보엠’에 참여했던 공연관계자 A씨가 출연자 대기실에서 겪은 일이다. A씨에 따르면 무대 위에서 일어난 화재를 목격하고 즉시 공연장을 벗어난 관객들과 달리 백스테이지와 2층ㆍ3층 대기실에서 출연 차례를 기다리던 배우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을 경험해야 했다. 특히 3층 대기실에 있던 어린이 합창단 단원 20명은 안내자가 없어 화재시 이용해서는 안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뒤늦게 대피했다는 것이 A씨의 목격담이다.

예술의전당은 “관객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안정적으로 대피하도록 하기 위해 안내방송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무대 위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출연자들은 대기실이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차고 나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대 뒤와 2층ㆍ3층에 마련된 연기자 대기실에서는 소형 모니터 TV 몇대를 통해서만 무대 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하우스 매니저와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비교적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었던 관객들과 달리 배우와 무대 스태프들 사이에서 부상자가 많았던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다.

또 배우와 무대 스태프를 포함한 25명이 병원에 분산 이송됐다는 언론 보도와 달리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배우와 스태프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간신히 빠져나와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해보니 어림잡아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번 화재 때문에 치료를 받고 있었다”며 “출연 인원 100여명과 스태프 50여명 중 절반 이상이 예술의전당 주변 영동세브란스병원ㆍ중앙대병원ㆍ강남성모병원ㆍ순천향병원에 분산돼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안내방송을 하지 않은 것 외에도 관객들이 목격한 스프링클러의 작동 시점이 예술의전당 측의 주장과 다른 점, 화재 직후 119에 먼저 신고하지 않고 자체 진압을 시도한 점 등의 의혹과 안전불감증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이날 오페라하우스 2층에 위치한 토월극장에서 연극 ‘여름과 연기’를 관람했던 관객들 역시 예술의전당 측의 대피 유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관객 B씨는 “공연 진행 중 관계자가 갑자기 무대에 올라 전후상황 설명 없이 ‘안전상의 문제로 모두 나가달라’고 했다”며 “연기하던 배우가 오죽 당황스러웠으면 그 사람에게 언성을 높였겠느냐”고 말했다.

한편 이날 오페라 및 공연을 관람했던 관객들은 예술의전당 측의 미숙한 대처와 공연료· 주차료 환불 등을 두고 예술의전당에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김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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