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평>작품 안읽는 문학교육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루쉰(魯迅)이 지은「아Q정전(阿Q正傳)」의 배경인 사건은?』『쥘 베른의 작품을 번안한 이해조(李海朝)의 신소설은?』『1940년 전후 청록파(靑鹿派)시인들을 배출한 문예지는?』고교생이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장학퀴즈류의 방송프로그램 에서 주어지는 문학관련 문제들은 대충 이런 식이다.문학을 전공하지 않는사람이라면 알고 있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꼭 알아야 할 필요도없는 이런 문제들을 우리 청소년들은「신해혁명(辛亥革命)」「철세계(鐵世界)」「문장(文章)」이라고 거 침없이 알아 맞힌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어봤느냐』는 물음에『「로미오」는 읽었지만「줄리엣」은 아직 읽지 못했다』고 대답하더라는 수십년전의우스갯소리가 통용되는 시대는 분명 아니다.지금의 우리 청소년들은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동서고금의 저명한 문인들에 대해서는 그 이름들을 꿰뚫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떤 경향의 어떤 작품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도 거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떤 시험에서건 객관식 문제라면 적어도 문학에 관한한 어지간한 학생들은 정 확하게 알아 맞히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문학 교육이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왔고,교육및 시험 제도가 청소년들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그런 방향으로만 치우치게 해온 탓이다. 우리 문학 교육의 실상과 청소년들의 문학에 대한 관심의 향방은 대학입시의 현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면접 경험이 있는 대학교수들에게서 곧잘 이런 소리를 듣는다.수험생들에게 어떤 문학작품을 읽었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고전에서부 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작가.작품들이 청산유수처럼 쏟아져나온다고 한다.국내외 문제작.화제작의 줄거리만 요약한 책들도 많기 때문에 그 내용이나 경향 따위를 서슴없이 덧붙이는 학생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작품의 본질이나 「감춰진 뜻」에 관한 질문이 던져지면 한결같이 묵묵부답이더라고 한탄한다.물론 작품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우리 문학 교육은 오랜 세월동안 문학사 또는 문학이론을 암기하는데 치중해왔다.중.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에서조차 문학 교육의 핵심은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문학사나 문학이론이 문학 교육에서 배제돼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가장 중요시돼야 할「작품 읽기」가 도외시된 문학 교육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가 문학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은 그 역사나 이론 따위의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작품속에 담겨져 있는 삶과 사물의 본질 규명이다.
거기에서 인간과 삶의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고,각자의삶을 풍요롭 게 하는 이해력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혼자 터득한「작품 읽기」의 문학공부로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 까닭이다.문학사나 문학이론을 아무리 꿰뚫고 있다 한들 방송의 퀴즈프로그램에서좋은 성적을 내는데는 혹 도움이 될는지 몰라도 살아가는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문제가 뜻있는 학자들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부터의 일이다.최근만 해도 서울대 김대행(金大幸)교수가『문학교육,어떻게 할 것인가』(「문예중앙」가을호)를,연세대 이상섭(李商燮)교수가『문학공부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세계 의 문학」겨울호)를 각각 발표해 뒤틀린 문학교육의 현실을 개탄했다.
金교수는『작품을 읽음으로써 말 잘하고 글 잘 읽고 잘 쓰게 하는 것을 문학교육의 1차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李교수는『문학 공부는 창작 연습,곧 글쓰기를 전제로 이뤄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고전과 현대작품을 민감하게 깊이 거듭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삶에 어떤도움 될까 『이문열(李文烈)의「삼국지」를 열다섯번이나 읽은 것이 대학입시 논술고사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는금년 서울대 수석합격자의 술회는 비록 책광고에 인용된 것이기는하지만 과장된 얘기가 아닐 것이다.『대학입시 본고사의 논술 비중이 입시를 앞둔 청소년들의 문학작품 읽기에 혹 활기를 불어넣어 줄는지도 모른다』는 어느 교수의 농섞인 전망이 그나마 우리청소년들의 문학교육에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을는지 기대를 갖게한다.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