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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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그리고,산 자도 말이 없었다(8)명국이한테라도 쌓이고 쌓인 긴 얘기를 해서일까.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그가 소리치던 말이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내려오는 화순의 가슴에 살아서 웅웅거렸다.
그렇게 소리쳤었지.
『이 쌍놈의 병원인지 뭔지,불을 확 싸질러도 속이 시원치 않은 마당인데,이것들이 사람 알기를 개 돼지 만큼도 안 알아.때되면 밥 먹고 약 먹으라고?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서 먹는 줄 아냐? 어떻게든 목숨 부지해서 너희놈들 꺼꾸러지 는 거 그거 하나 보자고 산다.이것들이 정말 뭘 알고나 있는 거여 뭐여.』불빛 환한 일본인들의 숙소에서는 생선 굽는 냄새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나왔다.그런 거겠지요,아저씨.사는 건 저런 거겠지요. 언젠가 명국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농담반 진담반 섞어가면서그는 말했었다.
『너 아냐?』 『뭐를요.』 『내가 널 눈여겨 봐 둔거.』 『눈여겨 보다니요.내가 뭐 어때서요.』 『그렇게 말을 받지 말아.내 이 나이에 속마음 이야기하는 거다.』 『그래서…눈여겨 봐뒀다가 뭐에 쓰시게요.』 『각시 삼을까 했지.』 『아무리 시궁창같이 살기로서니,그런 말하는거 아니랍니다.점잖은 분이.』 『장난하는게 아니다.내가 그랬다니까.』 『그런데 왜 그런 말을 나한테는 안했어요.』 『부끄러워서,그래서 그랬다.』 그렇게 말하며 명국은 웃었었다.
화순도 따라 웃었지만 그때 가슴 속을 무언가가 싸아하고 아프게 지나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헌데,그놈이…내 각시 할라고 했더니 나 다리잘린 사이에 새치기를 했어.』 그놈이란 길남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한숨을 쉬면서 화순은 말꼬리를 돌렸었다.
『각시되기는 애시당초 틀린 몸이니까,오빠 동생하면서 서로 의지나 하고 살지요.』 『오빠 동생 다르고,서방 각시 또 다르지. 내 말이 어디 틀렸냐?』 『그저 남자들이란 다…점잖은 개가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하여튼.』 『그래도 잘 됐지 뭐냐.
어디 이 바닥에 길남이만한 녀석 흔한 줄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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