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EYE] 푸틴과 러시아식 자본주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호 21면

푸틴의 러시아를 보는 바깥의 눈은 두 갈래다. 민주화에 실패한 러시아가 그 하나다. 그리고 급속히 떠오르는 신흥 자본주의국가 러시아가 또 다른 하나다.

지난 2일 총선에서 대승한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한 서방세계의 차가운 시선은 첫 번째 관점이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푸틴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 인사 대신 ‘우려’를 표명했다. 조직적인 부정선거와 반대세력 탄압에 따른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였다.

푸틴의 러시아는 누가 보아도 민주적이 아니다. 권력분립은 형식이고, 정당들은 통제된 허수아비이고, 말이 연방이지 실제는 고도의 중앙집권 국가다. 푸틴 스스로 ‘관리된 민주주의(managed democracy)’를 표방한다.

내년 3월 대통령 연임 임기가 끝나지만 그 이후는 안개 속이다. 후계자를 지명해 대통령에 앉히고 자신은 총리로 실권을 장악하는 방안, 헌법을 개정해 3선 대통령이 되는 방안, 아니면 러시아의 ‘국가지도자’ 또는 ‘현대판 황제’로 군림하는 방안이 저울질되고 있다. 어떤 방안으로든 푸틴은 계속 건재할 것이란 얘기가 된다.

권위주의적 압제에서 신음하는 러시아 내 민주화 세력과 언론들에 이번 총선은 절망 그 자체다. 푸틴은 총선을 자신에 대한 국민의 신임투표로 여론을 몰았고 64%의 지지를 얻어냈다. 신흥 산유대국의 오일 머니 앞에 민주화 열망이 뒷전으로 밀렸다고나 할까.

푸틴은 4개 정당이 의회선거에 참여해 9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는 사실이 러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있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러시아를 더 이상 파국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국민들의 책임의식이 러시아를 경제적·사회적·정치적으로 강건한 나라로 만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푸틴이 국가경제력을 복원·강화시키고 국제적 위신을 되찾게 했다는 데 국민들은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주역 미하일 고르바초프마저 1990년대 혼돈에서 회복하는 과정에서 권위주의 통치는 불가피했다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그런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지금은 그 길로 가는 과정”이라고 푸틴을 최근 두둔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어느 것이 먼저냐는 우선순위의 문제가 여기서도 제기된다.

러시아 출신으로 하버드의 러시아통인 안드레이 슈레이퍼 교수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비록 취약하고 흠결이 있지만 공산주의로부터의 탈피는 확실하다는 의미에서 러시아를 ‘정상 국가’로 분류한다. 사유재산을 가진 부르주아 계층이 속속 생겨나고 경제가 외부세계에 개방돼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조악한 자본주의로 표현되기도 한다. 올리가키(신흥재벌 및 과두자본가)와 중산계층 모두에 적용되는 시장경제적 제도 확립이 당면 과제이지만 서구식 민주주의에는 유보적이다.

푸틴은 국가경제를 몇몇 측근들과 비즈니스하듯 ‘러시아 주식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와 각료들은 ‘이사회’ 구성원들이고, 국영 석유 및 가스공사 로스네프트와 가스프롬이 핵심 주력이다. 서방 등 외국기업들의 인수 손길을 차단시키며 이들을 글로벌 톱 기업으로 올려놓는 일이 주요 목표다.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처럼 서구화를 추진하되 그 방식은 러시아식으로 하겠다는 얘기다. 민주주의보다 자본주의를 우선하고 ‘푸틴주의’ 내지 ‘시장 레닌주의(Market Leninism)’에 입각한 자본주의의 ‘러시아 버전’을 고집한다.

그러나 민주적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국가 자본주의는 극소수에 혜택이 한정되는 강탈 자본주의가 될 공산이 크다. ‘푸른 눈의 작은 거인’ 푸틴이 새로운 ‘러시아 모델’로 ‘21세기 표트르 대제’로 부활할지, ‘어둠의 제국’ 마지막 황제가 될지는 세기적 주목거리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