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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믿지 못할 수능 등급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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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어제 발표된 수능 성적이 우려했던 대로 등급제의 문제점을 현실로 드러냈다. 시험의 기본인 공정성·합리성·정확성·변별력에서 치명적 결점이 확인된 것이다. 일부 영역에선 문제 하나를 틀리고도 2등급을 받았다. 이 때문에 희망 대학에 지원하지 못하는 학생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90점이 1등급인 반면 89점은 83점과 같은 2등급인 영역도 있었다. 1점 차이라도 운 좋으면 1등급으로 만점 대우를 받고, 운 나쁘면 2등급인 것이다. 그래서 ‘등급은 운(運)’이란 말까지 나온다.

수능 총점은 더 높은데 등급 합산에선 뒤처지는 불공정한 일도 벌어졌다. 어떻게든 모든 영역에서 1등급인 학생이, 한 과목 2등급에 나머지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1등급인 학생보다 유리한 것이다. 학생·학부모들의 점수 공개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법적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도 크다.

정부의 등급별 표준 분포 비율 역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수리 가의 경우 2등급(목표 7%)은 동점자가 많아 10.08%, 3등급(12%)은 9.55%였다. 2등급의 변별력이 없어지고, 학교는 대입 지도 방법을 몰라 속타고 있다. 엿가락 같은 등급 분포로 인해 눈치작전은 어느 때보다 치열해지고, 대입 컨설팅·논술 등 사교육 시장은 더욱 인기를 끌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수험생의 대입 부담과 사교육을 줄일 획기적 대입 개혁이라며 내놓은 수능·내신 9등급제는 이미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학생들은 3년 내내 ‘죽음의 트라이앵글(수능·내신·논술)’ 속에서 허덕였고, ‘저주받은 89년생’이란 섬뜩한 말까지 생겼다. 사교육은 더욱 번성했다. 그런데 그 결과마저 엉터리에 가까우니, 국가시험이라 할 수 있는가.
대입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예측할 수 없고, 납득하기 어렵고, 신뢰받지 못하는 국가시험에 맡겨야 하는 우리 학생들이 너무 불쌍하다. 벌써 억울해서 재수하겠다는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학생들이 국가 정책 자체를 불신하게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대입 자율화와 등급제 폐지가 학생들을 질곡의 늪에서 구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