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왼쪽에서 셋째)가 첫 외국인 제자 데일 존슨(왼쪽에서 둘째)과 함께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 맨 왼쪽은 스승 김윤덕 선생, 맨 오른쪽은 김준현씨.
존슨은 나의 첫 외국인 제자다. 나는 존슨 등 10여 명의 외국인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다. 존슨은 처음에 김윤덕 선생을 찾아가 가야금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국립국악원에서 운현궁 안에 차려준 김 선생의 연구실을 직접 찾아간 것이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던 김 선생은 그를 나에게 보냈다. 존슨은 미국 군복을 입은 채 가야금을 배우러 다녔다.
1년 넘게 나에게 가야금을 배운 후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한국의 문화에 빠졌던 경험 때문에 한국학을 전공하려고 했지만 전공이 개설된 대학이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그가 택한 전공은 중국학이었다. 중국의 극음악을 연구한다는 내용의 편지도 종종 보냈다. 한국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시작한 중국학에서 권위자가 돼 UC산타크루즈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2004년 내가 미국 서부 지역 공연을 갔을 때 산타크루즈에서 연주를 마치고 무대 뒤로 할아버지가 다 된 존슨이 찾아왔다. 거의 50년 만에 만난 것이다. 종종 주고받던 편지도 끊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놀랍고 반가웠다. 그는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존슨은 자료를 소중히 보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가르치던 시절 일일이 손으로 그렸던 악보를 모두 보관하고 있었다.
2001년에 정년퇴직을 하고 살면서 이렇게 끊어졌던 인연이 이어져 다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30대, 새파랗던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을 우연히 다시 마주치는 것이다. 내가 하와이에서 65년 녹음한 첫 앨범에 대하여 격찬하는 평을 66년 민족음악학 학술지에 썼던 윌리암 아드리안츠라는 음악학자를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를 40여 년이 지나 우연히 다시 만났다. 2003년 암스텔담 트로피컬 뮤지엄에서 열린 연주회에 암스테르담 대학의 노교수가 된 그가 참석한 것이다. 이처럼 외국에서의 연주가 끝나면 예상치 못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기일쑤였다.
한번 맺은 인연이 수십 년이 지난 후 다시 이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옛날에 있었던 일이 다시 돌고 도는 것 같은 신비감을 이 같은 만남을 통해 느낀다. 30, 40대 때에는 몰랐던 60, 70대 특유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황병기<가야금 명인>가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