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00년대를향한무비워>9.베니스영화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제51회 베니스영화제(94.9.1~12)가 열린 살사 그란데극장의 프레스센터에서 화제가 됐던 것중 하나는 유럽의 3대 영화제가 통합되면 어디가 밑지고 어디가 득보게 될 것이냐는 것이었다.손해를 보는 곳으로 칸영화제를 들었고 가장 득을 보게 될곳으로 베니스영화제가 꼽혔다.이유인즉 미국배우들을 부르는데 칸영화제가 훨씬 잘 먹히기 때문이란다.칸영화제가 밑지는 까닭은 베니스와 베를린의 촌스런(?)사람들이 칸에 붐비면 상대적으로 돈많은 관광객들의 자리를 그만큼 축 내게 될 것이란 설명이다.
여기에서 3개 영화제의 성격과 특징을 대충 읽을 수 있다.즉예술성을 내세우지만 대중성도 무시하지 않는 칸은 화려한 할리우드식 영화제의 틀을 갖고 있고,베니스는 할리우드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실험성이 강한 영화와 아시아등 제3 세계영화권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그중간쯤의 냉담한 입장에서 베를린은 사실주의 계열의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서깊은 3대 영화제라도 관객과 세계영화인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선 영화최강국 미국을 참여시키지 않고는 배겨내기 힘들다.
할리우드 스타들을 불러와 대중앞에 세우는 흉내라도 내야한다.
이번에도 베니스영화제는 해리슨 포드,알 파치노 등 할리우드 스타들을 불러 얼굴마담(?)으로 삼았다.
아닌게 아니라 미국의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3대영화제를 통합해 열자는 이야기도 나왔다.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분야는 유서깊은 영화제들 하나 뿐이다.그런데 이 영화제도 차츰 작품성 있는 비할리우드식 미국영화들이 참가를 기피하고 영화 소비가 다채널화되고 영화산업이 복잡화됨에 따라 그 명성과 필요성이 옛날과같지 않게 됐다.
베니스영화제의 집행위원회는 베니스市에서 구성한다.원래 1895년에 생긴 베니스비엔날레의 시각예술과 건축부문에 1932년 영화가 추가되면서 베니스영화제가 생기게 됐다.한때 세계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창했던 베니스의 영광을 예술에서 재현 한다는 원대한 야망이 깔려 있었다.
세계 최초의 영화제인 베니스영화제는 그후 2차대전 직후의 정치적 격동기에서 중단과 출품거부라는 질곡을 겪는다.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는 영화를 정치도구화 했으며 영화제를 그 무대로 삼았다.
그러나 전후 심사위원 진용과 수상작 선정방법을 일신하면서 관제의 틀을 벗어난다.
이어 베니스영화제는 51년 당시만해도 파격적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아시아영화에 대상(大賞)인 황금사자상을 수여함으로써 제3세계영화인들에게 꿈을 심어줬다.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감독의『라쇼몽』을 선택한 것.
이후 베니스영화제의 이런 경향은 1989년 대만 후 시아오시엔감독의 『비정성시』와 92년 장이모감독의 『귀주이야기』에 대상을 안김으로써 계속 유지돼 왔다.올해의 경우도 대만 차이밍량감독의 『애정만세』가 마케도니아의 밀초 만체프스키 감독의 『비오기 전에』와 황금사자상을 공동수상함으로써 베니스영화제의 전통을 새삼 확인 됐다.우리나라의 경우 81년 이두용감독의 『피막』이 처음 비경쟁부문에 참가하는데서 출발,87년 임권택감독의 『씨받이』가 본선에 올라 강수연이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한국영화계와 베니스영화제는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다.
이는 92년까지 집행위원장이었던 구리엘모 비라기의 한국영화에대한 이해가 큰 힘이 됐었는데 현재집행위원장인 질로 폰테코르포는 한국을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생소한 인물이란데서도 연유한다. 국제영화제의 엔트리는 국제영화제의 사교능력이 좌우하기 때문에 우리영화의 해외홍보를 위해선 국제영화인맥에 적극 가담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여기서도 제기된다.
[베니스=李揆和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