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 5년만에 PC척척-75세 姜泰遠옹의 컴퓨터 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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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컴퓨터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어차피 사람이 쓰는 건데.이 나이에 자동차 운전 배우는 것보다 쉽잖아요.』 지난해 말 PC통신에 띄운 글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는 바람에 일약 유명인이 된 강태원(姜泰遠.75)옹은 왜 컴퓨터를 배우게 됐는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서울 상계동의 조그마한 아파트에 컴퓨터와 잉크젯프린터.팩시밀리를 설치해놓고 각종 소프트웨어와 컴퓨터서적에 묻혀사는 「신세대 할아버지」다.그러나 姜옹은 자신을 「의지의 할아버지」로 바라보는 시각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사실을 고백하면 호기심때문이었지요.사람이 늙으면 애가 된다고 하잖아요.복권추첨도,선거도 컴퓨터로 한다는데 죽기전에 한번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姜옹이 동네 컴퓨터학원을 찾아 베이식.로터스.워드프로세서.데이터베이스등을 배운 것은 지난 89년.
XT급 컴퓨터를 장만하고 컴퓨터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어만 배우자는 생각으로 몰두하다보니 언제부턴가 발음까지 유창해졌다.92년말 PC통신 하이텔에 「원로방」이 생긴 이후 노인들에게 향수어린 옛서울의 이야기를 적어보낸 것이 쌓여 『서 울에 살어리랏다』라는 책을 펴낸 것도 이 XT급 컴퓨터가 한 일이다.
『컴퓨터언어중의 하나인 C언어를 배우지 못해 직접 프로그래밍을 할 수 없는 게 늘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그래서 전문가들이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을 쓸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시간나는대로컴퓨터를 두드렸지요.』 주머니사정이 넉넉지 않은 백발노인의 정보사냥터는 주로 PC통신의 무료공개자료실.
틈틈이 「파일받기」기능을 통해 관심있는 프로그램들을 살펴보다보니 파일관리.이동.저장등 컴퓨터운용 실력도 덩달아 늘었다.
하드디스크가 없어 대용량의 프로그램들을 이용할 수 없었던 XT급 PC를 버리고 40메가바이트(MB)의 하드디스크를 갖춘 286급 컴퓨터를 구입하던 날 여의도만한 땅을 가진 기분이었다는 것이 姜옹의 회고다.
그러나 이것 역시 姜옹의 극성스런 지적 호기심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용량.
결국 올봄 120MB의 하드디스크에 또 420MB를 추가한 386급 컴퓨터를 구입하고 이것 저것 묻다 친해진 청계천 상인에게 컬러모니터와 프린터까지 싼 값에 들여놓았다.
이용도는 매우 낮으면서도 유행따라 컴퓨터를 갈아치우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컴퓨터 기능향상(업그레이드)을 꾀해온 셈이다.
조그만 개인기업의 점원으로 변변치 못한 젊은날을 보냈다는 姜옹에게 컴퓨터가 가져다준 생활의 변화 또한 대단하다.
지난 3월부터 교육방송라디오의 노인대상프로에 리포터로 출연,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며 『노년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고 호소하는가 하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하이텔 「원로방」에 이제는「청개구리의 시각」이란 제목의 시사평론을 쓰고 있다.성수대교가붕괴되던 날에는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중독된 양심을 정화하고 멀어진 정의감을 되찾고 마비된 책임감을 되살리자」는 매서운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姜옹이 내심 가장 기뻐하는 것은 컴퓨터입문 5년만에 컴퓨터선생님이 된 것.
지난 10월 퇴직한 체신공무원들의 모임인 체우회 회원들에게 2주에 걸쳐 하이텔 단말기 사용법 및 컴퓨터 기초이론을 가르쳐나이어린 사람들틈에서 어렵게 컴퓨터를 배우던 한을 깨끗이 씻었다. 매일 3회이상 PC통신에 접속하고 3시간 이상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며 동갑내기 부인에게 친절하게 컴퓨터를 가르쳐주는 姜옹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아직도 끝이 없다.
최근에는 일본어책을 번역해 컴퓨터출판을 진행중이고 글을 쓰다보니 한글맞춤법에 약한 것 같아 맞춤법기능이 갖춰진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구입해놓고 배운다고 했다.
『며칠후면 주문한 CD롬 드라이브가 도착할 거야.동식물도감과백과사전이 보고싶어 견딜 수가 있어야지.』 〈金政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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