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되살리자>1.外人아파트 헐고 과거청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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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20일 오후3시,20여년동안 남산의 얼굴을 가로막았던 남산 외인아파트가 폭파굉음과 함께 사라지면서 남산의 과거청산이 막(幕)을 올린다.
아물 겨를도 없었던 식민지배의 생채기와 뒤이은 성장.개발의 숨가쁜 질주속에서 스스로의 정체(正體)마저 잊어왔던 근대사 1백년의 아픈 과거들을 청산,민족자존을 회복해 나가려는 신호탄이기도 한 것이다.
이날 10여초만에 무너져 내리는 남산 외인아파트는 한말이후 끊일새 없었던 외세의 입김과 우리 자신의 무분별이 함께 빚어낸남산훼손의 상징이었다.
외자도입과 수출위주의 경제개발에 몰두했던 당시 3공화국정부는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지시로 외국공관및 외국상사주재원등을 위한 외인아파트및 외인주택단지 부지로 서울의 심장부인 남산중턱 5만여평을 공원용지에서 베어냈다.
71년 완공된 16~17층의 거대한 이 고층아파트군은 남쪽능선을 완전히 뭉개고 앉아 남산의 경관을 망쳐 왔었다.
남산은 6백년 도성(都城)의 영욕을 간직해 온 서울시민의 풍류의 도장이었다.
풍류가 우리 고유의 도(道)이듯이 박토에 뿌리를 내리고도 의연한 송림이 울창한 남산은 가장 친근한 산으로 민족삶의 애환을함께 해왔다.
높이 2백65m 90여만평의 면적으로 그리 높지도 빼어나지도않지만 세월과 함께 우리들 삶이 고스란히 담긴 산이다.
남산이 역사속으로 들어오기는 북악(北岳).인왕(仁旺).낙산(駱山)과 함께 조선의 도읍지인 한양의 내사산(內四山)에 들면서부터. 태조2년에 이름이 인경산(引慶山)에서 남산(南山)으로 바뀌고 이후 목멱(木覓)대왕을 모시는 산신제와 기우제를 지내기시작했으며 성곽과 전국의 봉화가 모이는 봉수대 5개가 축조됐다. 태조6년에는 오늘의 서울을 있게 한 무학대사를 모시는 국사당(國師堂)이 동쪽기슭에 세워져 나라의 성산으로 정해지면서 어느 누구도 소나무며 돌. 흙의 채취는 물론 묘자리도 쓰지 못했다. 진달래.철쭉이 만개하는 단오절이면 도성안의 장정들이 다투어 중턱의 예장(藝場)에 운집,씨름대회도 벌였으며 중양절(重陽節)이면 시인 묵객들이 계곡의 맑은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갓끈을 빨아 말리는 정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북쪽기슭에 왜군주둔지가 서고 다시 3백여년뒤 왜성대공원.조선신궁들이 국사당등을 대신하면서 남산은 극심한훼손길에 접어든다.6.25는 해방촌을 생겨나게 했고 개발의 미명아래 산허리를 빙 둘러가며 호텔 공공기관 외국 인거주지등을 짓고 굴을 뚫었다.
그래도 남산은 지금도 연간 1천4백여만명의 시민들이 찾는 가장 친근한 휴식처다.
재창조를 위한 파괴,외인아파트 폭파해체와 함께 남산은 또 한번의 전환점에 섰다.
〈鄭基煥기자〉 서울시는 남산외인아파트 해체를 계기로 본격적인「남산제모습 가꾸기」에 나서 필동의 수방사.안기부 등 대형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를 전통 문화동네.애국가마당.늘푸른언덕등으로 공원화하는 계획을 추진중이다.우리들 스스로가 한계선을 그어놓 고 훼손의 방식만 달리하는 눈가림식 복원이 앞으로 거듭돼서는 안된다.
더이상 지난 시절과 같은 단견과 조급함으로 남산의 모습을 일그러뜨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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