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5.쿠오바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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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제5공화국이라는 명칭의 무법정권 초기의 언론 통폐합 과정에서동양텔레비전(TBC-TV)이 KBS로 흡수되어 마지막 방송을 하던 날 밤 느닷없이 『쿠오바디스(Quo Vadis)』가 방영되었다.눈물을 흘리며 고별사를 하는 대신 이 영 화를 보여준 것은 분명히 탁월한 선택이었다.중학교 1학년때 국도극장으로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갔던 이 영화는 총천연색의 화려한 의상,흙바닥의 물고기 그림,네로 황제의 눈물단지,시각적인 로마의 찬란함,MGM의 웅장한 세트,데버러 커의 아름다움 같은 단편적인 기억을 내 머릿속에 남겼다.하지만 언론 대학살의 고별 프로그램으로 『쿠오바디스』를 봤을 때는 로마시대의 폭정이 우리들의 현실로 되살아나고 있으며,노벨문학상 수상자 셴키에비치(1846~1916)가 1980년 대 한민국에서 벌어질 사건을 자신의 소설에 서술해 놓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다.
「살인과 방화,오만과 공포」의 재능밖에 없고 엉터리 시인에,엉터리 음악가에,엉터리 정치가이면서 자신이 천재라고 착각하는 과대망상증 환자 폭군 네로의 횡포와 당시 신군부의 무지막지한 정치 폭행은 어쩌면 그토록 서로 닮았던가.
「새 로마를 짓기 위해 헌 로마를 불질러버린」 행위와 신군부의 기존 국가 파괴행위,불길을 피해 하수도로 피신하던 로마 시민들과 핍박받고 고통하던 한국인들,로마에 불을 지른 것은 「세상의 종말을 예언한 기독교인들」이라고 거짓말을 퍼 뜨린 로마의지도자들과 광주에선 폭도들이 방화와 살인을 자행했다고 발표하던계엄사령부,불타는 로마를 구경하며 노래하던 네로 황제와 광주 진압을 축하하려고 모여 파티를 열던 한국의 장군들,역사는 진실을 모를 것이라고 자신하며 자신들의 미화작업에 열중했던 사람들,그리고 오랜 박해의 세월 끝에 경기장에서 봉기하던 로마인들과6월 항쟁에 나섰던 한국인들.과연 과거는 미래의 예언이 아니었던가. 소피아 로렌.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엑스트라로 등장하기도 하니까 다시 볼 기회가 생기면 두 여배우가 어디에 박혀 있는지보물찾기를 해봐도 재미있을 것이다.
〈安正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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