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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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갈보가 하영이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영이 하고 내가… 도대체 어떻다는 거야?』 『이거 왜이래.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이야기야.』 『말해봐.뭘 어떻게 알고 있다는 건지….』 『너 확실히 멍하긴 멍하구나.우리 학년여자애들은 다 알고 있다니까 그러네.오죽하면 하영이가 반박문을써서 널 구해줬겠느냐구.』 하영이 이름이 자꾸만 거론되니까 내기분이 이상해지고 있었다.하영이는 그렇게 깊이 그렇게 멀리에서나마 삭지 않는 다이아몬드처럼 버티고 있으면서 빛을 발하고 있는 거였다.
『오늘 총장님이 말하는 거 못들었어? 우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애들이잖아.하영이처럼 척 하고 일류대학에 붙은 애하고 나하고는 과가 다른 종류일 거라구… 본지 오래 됐어.』 『내가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봐.하여간 하영인… 니가 전화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아무데나」에 앉아서 한 다른 이야기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내 마음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에 나란히 앉아서는 개갈보가 계속해서 조잘거렸다.
『난 요즘에 PC통신에 빠져있다구.너무 재미있는 거야.별의별정보가 거기 다 있는 거야.얼굴은 안보이지만 대화방에서 서로 아무 이야기나 주고 받구… 맛없는 상대면 금방 다른 상대를 찾으면 되구… 멍달수 너 여우시리즈 알어? 이건 바로 어제 나온거거든.』 날여우가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 이름은 익은여우야.하루는 익은토끼가 여우네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날여우가 받았어.여보세요… 「여보세요,저 익은여우 좀 바꿔주세요.」「자넨 익은여우 친군가?」 「네,그런데요.」 「그런데 자넨 전화예의도 모르나.친구네집에 전화를 걸어서 어른이 받았으면,저는익은여우 친구인 누군데요.익은여우 좀 바꿔주세요 그래야지 이게뭔가.다시 걸게.」 그래서 익은토끼가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대. 「여보세요,저는 익은여우의 친구되는 익은토낀데요,익은여우 있으면 좀 바꿔주시겠어요.」 「익은여우 아침에 나가고 없다.」희수는 자기가 말하고 나서 저혼자 쿡쿡 웃어댔다.
『뭐야.이게 끝이야…?』 『그래.웃기잖아.넌 안 우습니? 이게 헛소리 시리즈라는 거야.』 나는 별로 우습지도 않은데 우리자리 근처에 서있던 사람들이 쿡쿡 웃었다.내 옆에는 안경 낀 여학생이 서 있었는데,안경은 내 표정이 더 재미있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어댔다.
그야말로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헛소리였다.얼마 전에 어느 신문에 보니까 유명한 소설가라는 분이 우리말을 잘 쓰자면서「헷갈리다」는 틀린 말이고「헛갈리다」가 맞는 말이라고 하더니,며칠 있다가 다른 사람이 반박한 걸 보니까「헷갈리다」는 사전에 나오지만「헛갈리다」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괜히 인지 헷인지 갈리게 하던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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