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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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우리 어디 들어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지 뭐.
』 희수가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도 싫지 않았다.나는 사실 희수에게 빚이 있는 걸 모른척하고 일년이상이나 지내오지 않았던가.
『좋아.어디 아는데라도 있니,이 근처에.』 『아니.아무데나 들어가지 뭐.학교 근처가 다 비슷할 거야.』 『야 저기 좀 봐.진짜「아무데나」가 있잖아… 열나 웃기네.』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왜냐하면 근처의 간판 하나에「아무데나」라고 쓰여 있는 거였다.그래서 우리는「아무데나」라는 이름의 카펜지 커피숍인지에 들어갔다.지하실이었는데,입학식 날이라서 그런지 겨우 구석진 곳의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냥 커피를,희수는 레모네이드를 시켰다.주문받는 여자애가 사라지자 희수는 자신이 사범대학의 무용교육과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뭐야…?그럼 희수 니가 교직자가 되겠다는 소리잖아.
오,안돼.넌 왕착각이야.이럴 수는 없어.』 『이러지 마 제발.
나에 대해서 왕착각인 건 바로 너라구.내가 뭐 그렇게 막가는 앤줄 아니.…그런데 넌 무슨 과야? 국문과 맞지?』 『어떻게 알았니.넌 철학과를 나와서 족집게 점쟁이가 될 걸 그랬어.너한텐 뭐랄까… 신끼 같은 게 있거든.이건 정말이야.』 『니가 교지에 쓴 거 나도 몇번 봤지.아주 좋았어.특히 어떤 중학교 여자애하고 가출했던 이야긴 아주 좋았다구.』 커피와 레모네이드가와서 우린 그걸 우아하게 조금씩 조금씩 마셨다.희수가 봤다고 그러는 건 내가 고3때 쓴『우리들의 텅빈 도시』라는 단편소설이었다.같은 동네에 사는 「외로운」중학교 2학년짜리 여자애와 고3짜리 「나」가 낯선 도시로 도망가서 일주일동안 헤매는 이야긴데,사실 나는 아주 그럴듯한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거였다.
『어휴 개갈보치고는 수준이 대단한데.그거 난해한 소설인데.』『장난치지 마.정말 좋았다니까.넌 감각이 있어.우리를 근본적으로 우울하게 만드는 게 무언지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애 같더라니까.』 희수가 내 글에 대해서 진지하게 나오니까 난 참 쑥스러웠다.하지만 희수는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무언가를 생각할줄아는 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나는 어쨌든 다른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같이 살던 남자는 잘 있어? 있었잖아… 오빠라구 부르던대학생.』 『호성이 오빤… 그냥 가정교사였지 뭐.그래,1월까진우리 아파트에 같이 있었는데… 나갔어.나도 대학생이 됐으니까 뭐.』 『가정교사가 아니라 개인교수였던 거 아닌가.』 『그게 그거지.뭐가 다른거야.』 『글쎄 뉘앙스가 좀 다르잖아.가정교사는 공부만 가르치는 사람같구,개인교수는 어쩐지 다른 걸 가르치는 사람같구… 그렇잖아.어느쪽이었는지 물어보진 않을게.어쨌든 괜찮은 사람 같았으니까.』 희수가 눈을 한번 치켜떴다가 말았다.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않겠다 그런 표정이었다.희수가 불쑥 물었다. 『그러는 넌… 하영이 하고는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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