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과목만 공부 … 어려운 과학 누가 선택하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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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서울 청담고등학교 3학년 500여 명 중 올해 자연계반 학생은 150명, 전교생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2학년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전체 11개 반 중에서 자연계반은 3개 반 110여 명에 그쳤다.

이 학교 전화영(화학) 교사는 "자연계반 학생 중에서 심화과목인 과학Ⅱ 과목을 끝까지 공부하는 학생은 30%도 안 된다"며 "기초적인 화학반응식도 모르고 졸업하는 학생들이 늘어가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과학 분야에서 한국 학생들의 국제경쟁력이 추락하고 있다.

4일 발표된 OECD의 2006년 학업성취도 국제비교(PISA) 결과 한국 학생들의 과학 성적이 2000년 1위에서 2006년엔 11위로 급락했다. 특히 세계 2위까지 기록했던 최상위 5% 학생들의 과학 성적은 17위까지 떨어졌다.

교육계에선 선택과목 중심의 7차 교육과정이 과학 교육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정완호 한국과학교육단체총연합회(과교총) 회장은 "학생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명분은 좋았지만 대입에 유리한 과목 중심으로 교육과정이 변질되면서 과학을 뒷전으로 밀어낸 결과"라고 비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한 연구원도 "물리를 배우지 않고도 기계공학과에 갈 수 있는 제도가 개선되지 않는 한 학생들의 과학 경쟁력은 더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선택' 강요한 7차 교육과정 결과=2001년부터 시행된 7차 교육과정에서는 중학교와 고교 1학년 과학 수업 시수가 주당 4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었다. 선택과정인 고2~3학년 때는 과학.기술군(수학, 과학, 기술.가정) 과목 중 필요한 과목만 1~2과목 이상 선택해 들으면 된다.

수학을 선택한 인문계 학생들은 고2부터는 굳이 과학 과목을 배울 필요가 없다. 자연계 학생이라도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중에서 입시에 필요한 과목만 배우면 된다.

김찬종 서울대(지구과학교육학과) 교수는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이수해야 할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교육과정을 짜다 보니 과학교육 전반이 부실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2월 7차 교육과정 개정 때 과학교육 단체들은 교육부에 현재의 과학.기술군을 수학.과학군과 기술.가정군으로 분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대입에 필수적인 수학에 밀리고 상대적으로 학습 부담이 적은 기술.가정 교과에 밀려 과학이 설 자리가 없다는 위기 의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반영되지 못했다.

◆책 속에 갇힌 과학교육=PISA 2006 평가 결과 한국 학생들은 과학에 대한 지식은 잘 알지만,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과학적인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PISA의 평가문항은 수준 높은 과학 지식을 묻기보다 일상 생활에서의 과학적 판단 능력을 평가하는 문제들이다. 송진웅 서울대(물리교육과) 교수는 "일상적인 생활과 과학 교과의 내용이 동떨어져 있는 데다 탐구활동 없이 수업이 이뤄지기 때문에 학생들이 과학에 흥미를 느끼기 힘든 게 사실"이라고 분석했다.

고교 교사들은 "대입을 중심으로 과학 수업이 이뤄지다 보니 실험이나 탐구 활동을 여유 있게 할 겨를이 없다"고 토로한다. 이종복 김천고(물리) 교사는 "한 시간 실험을 위해선 준비하고 정리하는 데 3시간은 필요한데 대입 진도를 맞추자면 그럴 시간이 없다"며 "수업시간 수를 늘리고 실험 수업을 적극 배려하는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정완호 과교총 회장은 "IT.BT 같은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창의적인 기초 과학교육이 튼튼한 사회에서 나온다"며 "정부가 나서서 대입 시험에 휘둘리지 않는 과학교육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PISA(학업성취도 국제비교.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OECD가 각국 교육정책을 수립하는 기초자료로 제공하기 위해 만15세 학생들의 읽기, 수학, 과학 성적을 3년 단위로 시행하는 평가. 평가에 참여하는 각국은 평가 대상 학생들을 표집해 2시간 동안 지필고사를 보게 한다. PISA 2006에는 총 57개국(OECD 국가 30개국 포함)이 참여했다.

배노필.박수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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