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함께>"硏史隨錄"낸 李基白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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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역사를 버텨온 사람들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아닙니다.시대의 뒤안에 감춰진 이름없는 사람들이 참된 주인공이지요.위대한 인물의 업적이나 대사건들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합니다.학문적 한계 때문에 비록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을외면하고는 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난달 고희(古稀)를 맞은 원로사학자 이기백(李基白)한림대교수가 50여년간의 학문세계를 되돌아 본 『연사수록(硏史隨錄)』(일조각刊)을 냈다.지난47년 경성여상(京城女商) 교사시절부터 올해까지 각종잡지.신문.학술지등에 기고한 글을 한데 묶은 자전적 수상록으로일평생을 우리역사 연구에 몸바친 노학자의 성실함과 따뜻한 인간미가 짙게 풍겨나온다.
이 책은 그의 고희를 기념해 후학들이 낸『한국사학논총』(일조각) 두권에 대한 보답의 의미도 지닌다.50여년에 걸쳐 발표된글들을 수정없이 모은 것이지만 이 책에는 변하지 않는 커다란 줄기가 두개 있다.학문에 임하는 흔들리지 않는 소신과 역사의 대세에 묻혀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정감어린 시선이 바로 그것.
『남겨진 기록이 적어 학술논문으론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에 무게를 두었습니다.짧은 글로나마 역사의 그늘진 면을 드러내는 일이 사학자의 또다른 소명이라는 신념은 변함이 없었지요.』 李교수는 이에따라 그의 삶에 정신적 기둥 역할을 했던 과거와 현재의 여러 인물들을 소개한다.
주인의 혹사에도 불구하고 강한 불심(佛心)으로 극락왕생한 신라 경덕왕때의 노비 욱면(郁面),백제군의 공격에 앞장서서 최후를 맞은 신라장군 눌최(訥催)의 종,군대시절 사고로 전신마비가되었으면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긴 구필(口筆)화가 故김준호(金準浩)씨,항상 비가 샜던 인왕산밑 옛집을 완벽하게 수리했던 어느늙은 기술자등을 주목한다.
『옛 앨범을 들춰보듯 다시 이들의 이야기를 읽을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가끔 눈물을 흘립니다.학문의 세계도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이들의 숨은 노력 덕분에 공부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되는 것이지요.진리는 먼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 변에 있습니다.그 세계를 망각하면 죽은 학문이 되기 쉽지요.이런 진리를 존중해야 건전한 사회입니다.이것을 어기는 민족과 국가에는 결국파멸밖에 남지 않아요.』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교단을 떠나게되는 李교수.지난 15년동안 만성간염으로 고생했지만 특유의 잔잔하고 청초한 선비적 기풍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지적은 유달리 힘이 넘친다.李교수는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지난 87년부터 1년에 두차 례씩 현재 15집이 나온『한국사 시민강좌』를 숨이 다할 때까지 계속하고 정년퇴임 후에는 우리역사 흐름을 재미있는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쓴『쉽게 쓰는 한국사』저술에 주력하겠다고말했다. 〈朴正虎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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