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4.가토파르도(표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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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버트 랭커스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중.고등학교시절이 떠오르며 어렸을 때 추억과 함께 괜히 마음이 허전했다. 웃음과 눈이 매력적인 정의파 액션배우로 그는 많은 사람들의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또다른 일면을 갖고 있는 배우다.세계적 대가(大家)이탈리아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와의 만남이 그에게 새 로운 세계를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가토파르도』〈Il Gattopardo(표범).일본에선『산묘』(山猫)란 제명으로 개봉〉에서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친숙해진해적이라든지 아파치가 아닌 문화적이고 성숙한 인간의 고민을 그린 유럽의 사라져가는 귀족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익숙해져 있는 데서 헤어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나보다.『가토파르도』는 유럽에선 칸영화제 작품상(1963년)을 수상,걸작으로 인정받았고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기록했지만 할리우드의 액션 스타 랭커스터를 사랑했던 미 국 사람들은죽음을 찾아가는 염세주의자의 모습으로 변신한 랭커스터는 받아주지 않았다.이 영화가 나온지 25년이 지난 후에야 미국인들은 그를 환영했다.
이탈리아 작가 람페두사의 소설을 영화화한 비스콘티 감독은 역사적.정치적 배경 위에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깊이 있게 그리고있다. 1860년 이탈리아 시실리 시티.격변하는 사회상황 속에유서깊은 귀족가문으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던 살리나 왕자(버트랭커스터)는 현실과 타협하지 못한다.반면 몰락한 젊은 귀족인 그의 조카 탄크레디(알랭 들롱)는 역사적 흐름에 적 응하면서 야심만만하게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대조적 등장인물인 탄크레디는 바로 살리나 왕자가 그리는 이상적 모습이다.비스콘티는 탄크레디를 화면에 첫 소개할 때 왕자가수염을 깎고 있는 거울 속에 나타나게 함으로써 왕자와 탄크레디의 관계를 관객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애정과 부러움.존경 등이 엉켜가는 가운데 안젤리카(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나타나 신흥 재벌과 쇠퇴해가는 귀족 사이에 정략결혼이 이루어진다.
탄크레티는 첫눈에 안젤리카의 아름다움과 활달한 성격에 사랑을느낀다.그것을 안 왕자는 돈이 필요한 조카를 위해 귀족사회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안젤리카 아버지에게서 거액의 결혼 지참금을 요구하고 약속을 받아낸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죽음의 암시가 깔려 있다.비스콘티 자신도말했듯 어느 사회의 죽음,어느 계급의 죽음,한 개인의 죽음,사상의 죽음등이 영화 전체를 끌고 나간다.
마지막 시퀀스인 무도회 장면은 영화 전체의 약 3분의1을 차지하며 세계 영화사상 가장 긴 46분동안 펼쳐진다.
비스콘티는『가토파르도』에서「거울」이 주는 의미를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무도회 장면도 지금까지 전개된 스토리가 비쳐지는,보이지 않는 거울이라고도 볼 수 있다.어느 귀족집의 무도회에 여태까지 나왔던 모든 인물을 다 모아놓는다 .이 영화의뛰어난 점은 조연이나 단역까지도 등장인물 한사람 한 사람의 심리를 농도 짙게 표현하는 데 있다.
외로움과 무기력이 완연한 왕자를 화려한 춤 파티 속에 거닐게함으로써 더욱 강한 대조를 만들어 나간다.인간은 현실이 자기 손에서 벗어났을 때,세상 움직임이 자기를 빼놓고 진행될 때 느끼는 허전함은 참기 힘든 법이다.
살리나 왕자는 수시로 변하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지금까지 지켜온 질서와 가치관을 버릴 수 없다.또 그것을 스스로 원하지않는다.싸울 힘도 없다고 생각한다.그에게 남은 것은 고독과 죽음뿐이다.그는 오히려 죽음을 초대하고 싶어한다.
귀족 출신인 비스콘티는 소품 하나하나에도 진품을 원했고 카메라에 비치지 않는 서랍속까지도 내용물을 채우고 촬영했다.『가토파르도』를 보는 사람들은 실내장식이나 의상.액세서리들로 아름다운 장면 장면에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파리 =윤정희(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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