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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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떠난 자와 남는 자(58) 칠성댁 옆에서보낸 세 해는,그 충청도집 아저씨 말과 다르지 않았다.그랬다.
뺨을 맞아도 은가락지 낀 손에 맞으라던 그 첫날에 들었던 말처럼,그 집에서의 나날은 몸이 고단했을 뿐,어린 나이에도 견딜만한 것 이었다.
음식을 나르고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그런 허드렛일이 화순이 했던 일의 전부였지만 해가 바뀌면서 이제 그녀가 없으면 안 되게,제 몫을 해 나갔었다.
콩나물을 다듬으며 앉아 꾸벅꾸벅 졸기도 했고,겨울 이른 아침불을 넣으러 나올 때면 언 손이 터져 피가 나기도 했다.집생각을 하려고 해도 할 겨를이 없는 나날이 그렇게 흘러갔다.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타들어가는 불빛을 바라보며 그해 겨울 떠나온 집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화순은 그러나 집생각에 울어본 일이 없었다.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앞니를 악물었다. 눈물을 흘려야 하는 때는 엄마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어머니와 집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집을 떠올릴 때 거기에는 아버지가 있었다.때리고 부수고 그러다가 너부러져 술냄새와 코를 골며 네 활개를 펴고 잠이 들던 아버지.
눈을 뜨면 일어나 더듬듯 술병부터 찾던 아버지.
어머니는 집에 있지 않았다.그녀의 의식 속에서 어머니는 담장밖에 있었다.아버지의 매에 견디다 못해 도망을 나와 집에도 못들어가고 담장 밑에서 보내던 밤,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파고들던 그 품이 겨우 엄마였다.
엄마 아버지 다 있는데도 집을 나온 아이인 것을 아는 칠성댁은 그녀가 훌쩍거릴 때면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말하곤 했다.
『이게 어디서 울어,울기는.너 이제 커봐라.네가 네 어미 가슴에 대못질을 해도 얼마나 크게 했는지 알거다.울려면 그때 가서나 울어,이것아.』 해가 바뀌면서 조금씩 가게일도 몸에 배어갔고,이렇게 살면 되나보다 하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 고여오기 시작했다.
『저게 몸은 때까치 같아도 다부진데가 있다우.』 옆 가게의 아낙네에게 칠성댁은 그런 말도 했다.훗날 생각해 보면,그 삼년은 그녀에게 있어 차라리 겨울 밤 아랫목같았던 삼년이었다.몸도자랐고,드나드는 손님들 사이에 부대끼면서 나이보다 일찍 세상살이에도 눈이 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고생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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