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칼럼>집권세력의 좌절 증후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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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美國)의원선거에서 승리를 보장받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도 아니고,학식이나 용모도 아니다.의석(議席)을 쟁취하기 위한 최선의 무기는 현직의원 신분이다.56년 이후 재선을 시도한하원의원중 94%, 상원의원 가운데 83%가 다 시 당선됐다.
그러나 이 말은 8일 실시된 중간선거 前까지의 상황일 뿐이다.
상원의원의 3분의 1(35명)과 하원의원 전체(4백35명)를 뽑는 이번 선거는 상.하원을 지배해오던 민주당의 참패로 끝이 났다.집권 민주당(民主黨)후보들이 현 역의원 신분이라는 절대적이점을 갖추고 싸웠으면서도 공화당(共和黨) 신참 도전자들에게 대거 패배한 것이다.
특히 하원은「대지진」피해상황이 상원보다 훨씬 황량하다.미국 헌법은 임기 6년의 상원과 달리 하원은 2년마다 선거를 치름으로써 의사당에 항상 민의(民意)를 재충전토록 하는 조처를 취해놓고 있다.따라서 대통령선거와 대통령선거 사이에 실시되는 중간선거,특히 하원의원 선거결과는 민의의 점검이고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다.
중간선거는 으레 집권당에 불리하게 나오는 게 관례이긴 하다.
그러나 이번 패배의 규모는 통상적 수준을 초과한다.클린턴으로서는 차기 재선(再選)전망을 걱정하기에 앞서 당장의 임기중에도 레임덕 현상이 불가피해졌다.통치권자로서 최악의 난 국이고 수모라 할 수 있다.그러나 최근 집권 세력의 좌절은 미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독(統獨)이후 두번째로 지난달 16일 실시된 독일(獨逸)총선에서 헬무트 콜 총리는 일단 네번째 집권에 성공했다.그러나 득표 내용은 실망이었다.그가 이끄는 기민당(基民黨)연정(聯政)은 야당연합보다 불과 10석이 앞섰을 뿐이다.선거 전 66석의우세에 비하면 가슴이 섬뜩한 후퇴였다.
작년 3월의 프랑스 총선결과도 집권당엔 모욕이었다.
집권 사회당(社會黨)은 총5백77석을 선출하는 총선에서 겨우67석을 건졌다.88년 6월 총선때의 2백75석에 비하면 참패였다. 지난해 10월 캐나다 총선때 집권 진보보수당은 1백55석중 1백53석을 잃어 하루 아침에 단 2석의 제5당으로 전락했다.일본 자민당(自民黨)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지위를 상실하고 붕괴 위기에 몰려있는 상황도 쉽게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영국(英國)집권 보수당의 인기도 바닥에서 맴돌고 있다.러시아를 비롯해 동구(東歐)에서도 탈(脫)공산화 바람을 타고 집권했던 세력들이 이제는 대부분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이같은 상황은 국가마다,집권세력마다 나름대로의 개별적인원인과 배경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범세계적으로속출하고 있는 집권세력의 불신임(不信任)현상에 모종의 일관된 기류(氣流)가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그리고 기류가 잠재하고있다면 그것은 언제,어디까지 흘러갈 것인가.
서방 민주사회 식자(識者)들은 이같은 현상들이 베를린장벽 붕괴,소련의 와해 이후에 발생한 사실임을 주목하면서 냉전.대결시대에 국력과 국민적 관심을 집결시켜온 이데올로기의 상실과 관련된게 아닌가 추정한다.그런가하면 세대 변화에 따라 주로 젊은층이 정치세력에 대한 일체감.아이덴티티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정치인에 대한 실망감이 악화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집권세력에 대한 불신임 현상이 서울만은 예외일 것이라고 보는이가 있다면 경솔한 생각이다.작년초 출범때 충천했던 문민정부 인기는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부시행정부,「변화」의 기치를 내걸고 백악관을 점령했던 클린턴 행정부의 지지도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강 건너 불」일까 범죄.사고.정치혼란등으로 지금 국민은 불안하고,지치고,화가 나 있다.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10일 亞太경제협력체(APEC)정상회담을 위해 출국하면서 작금(昨今)의 총체적 사회 난조(亂調)현상에 대해『서로가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반 성하자』고 요구하고『다시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다시 시작하자」는 다짐에는 국가를 재건설하는 수준의 지도자 각오와 집권세력의 청사진 제시가 필수적이다.클린턴도「변화」와「새 출발」을 천명했었지만 현상 유지에 그쳤고,그 결과는 이번 중간선거였다.범세계적 현상으로 번지고 있는 지도 세력의 좌절을「강 건너 불」로 보지 말라.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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