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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취임1년 특별대담-1]<br> "난 포퓰리스트 아닌 실용주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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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노무현 대통령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특별대담은 3시간35분 동안 진행됐다. 낮 12시부터 청와대 본관 백악실(白岳室)에서 1시간20분 동안 오찬을 함께하며 사전 대화를 나눴다. 이후 청와대 경내 상춘재(常春齋)로 옮겨 2시간15분 동안 공식 특별대담을 했다. 시종 진지하고 차분한 분위기였고 중간 중간 큰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오찬과 대담 내내 청와대에서 김우식 비서실장.박봉흠 정책실장.이병완 홍보수석 등이, 중앙일보에서는 김수길 편집국장.이연홍 정치부장 등이 배석했다. 다음은 盧대통령과 洪회장의 대담 주요 내용.(경어 생략)

◇탈권위주의 리더십과 포퓰리즘

▶洪회장=盧대통령 취임 1년에 대해 여러 평가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역시 권위주의 타파라고 생각한다. 오늘 청와대에 들어오는데 비표를 달게 하지 않아 깜짝 놀랐다. 전두환 대통령 당시 외국 언론인들이 부부 동반으로 청와대를 예방했는데 경호실에서 부인들에게 "全대통령의 손이 다이아몬드 반지 때문에 상할 수 있으니 반지를 뽑으라"고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든 탈권위주의는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다.

▶盧대통령=지금도 내가 못 느끼는 사이에 그런 게 남아있을지 모른다. 오늘 대담 준비를 위해 어제 저녁 비서관들과 식사를 하며 토론했다. 과거 대통령 시절에는 그런 자리가 없었다고 하더라. 나는 국정의 3분의 1 정도는 비서관들과 식사하면서 격의 없는 토론을 통해 처리한다. 청와대 격식 파괴의 큰 이유는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창조적 생산력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그런 격식 파괴와 자유분방함을 새롭다며 호의적으로 보는 쪽이 있고 "저게 뭐야"라고 하는 쪽도 있었다.

▶洪회장=엊그제 인터넷에서 미군 용산기지 이전과 관련해 대통령이 "실용주의 노선에 기초한 개혁적 합리주의를 추구하겠다"고 언급한 것을 봤다. 그 말 자체를 놓고는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도 사시(斜視)로 보아 현실주의, 더 나아가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라고 비판할 세력도 있을 것이다.

결국 남북.남남.여야.지역 갈등을 비롯해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간의 가장 큰 문제는 정책적 차이 이전에 불신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불신의 문제를 제거하는 일차적 소임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본다.

▶盧대통령=정치인의 말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대신 한 정치인의 삶의 궤적을 흐름으로 봐야 그 사람이 뭘 추구하는지를 알 수 있다.

지난 1년간 나는 일관되게 개혁적 합리주의와 원칙주의를 추구해 왔다.

이랬다 저랬다 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한가지 있다면 노사 관계인데, 그것도 전술 운용의 차이였을 뿐이다. 부시 미 대통령도 대북 문제에서 때로는 강경하게, 때로는 유연하게 나오지만 결국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노사 문제에서 항상 법과 원칙, 대화와 타협이란 노선을 지켰다. 지난 1년 전체로 보아 내가 과연 투쟁을 조장했는가, 아니면 노동자들이 좀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일정한 규율을 준수하는 방향으로 가게 했는가. 지난해 불법 파업 건수가 60%쯤 줄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앞으로 합법적 파업도 줄여 가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개혁적 실용주의라고 해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인기영합주의라고들 한다. 하지만 내가 인기영합주의자라면 왜 파병을 하며, 왜 임금 인상을 자제하자고 하겠나. 왜 자유무역협정을 맺자고 하며, 왜 국민연금 개혁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내놨겠나.

나는 5년 뒤, 10년 뒤에도 책임질 수 있는 정책이 아니면 안 되며 시스템을 흔드는 정책도 안 된다고 늘 말한다. 경기부양책도, 신용불량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洪회장=포퓰리즘의 전형이 노태우 대통령 시절 3당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택지소유상한제와 토지초과이득세였다. 일정 규모 이상의 택지에 대해 세금을 과하게 물렸는데 뒤에 위헌 결정이 나서 세금을 안 낸 사람들은 그냥 넘어갔다. 세금 낸 사람들은 돌려받지도 못했다.

토초세법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던, 대한민국에만 있던 법이었다. 흔히 글로벌 스탠더드를 얘기하는데, 우리 모두 이런 약속을 하나 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우리가 닮고 싶어하는 나라에 없는 법은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아무리 만장일치가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이 바로 대통령이 언급한 5년 후, 10년 후에도 책임질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길이다.

▶盧대통령=좋은 말이다. 이런 이야기는 어떤가. 요 근래 나는 부동산 가격만큼은 확실히 잡으라고 지시했다. 이와 관련해 아파트 공사비 원가 공개 문제가 있다. 일단 공영 개발하는 아파트의 원가는 공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민영 아파트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다. 아마 여러분은 내가 원가를 공개하라 하고 장관이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번 보고받으면서 나는 "시장에서 상품 원가를 공개하라는 것이 시장 원리에 맞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가격이 수요.공급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수요.공급이 궁극적으로 가격을 결정하는 것 아닌가. 그 질서를 존중하면서 정책을 펴라고 지시해 토론 과제로 넘겨 놨다. 洪회장도 내 발언 내용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웃음) 나는 원칙주의자고 동시에 실용주의자다. 실용적일 뿐 아니라 정부의 정책 수단도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정책과 시장친화적 정책, 규제도 시장친화적 규제를 항상 우선해 쓰도록 하고 있다.

◇사회 갈등의 극복

▶洪회장=역대 대통령들은 다 공과가 있고, 역사 속에서 이러이러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된다. 盧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억됐으면 하는지.

▶盧대통령=그런 생각은 비교적 덜 하는 편이지만, 왜 대통령을 하려 했나 하고 생각해 본다면 역시 지역주의 극복이었다. 지역구도라는 것을 그렇게 큰 문제로 느끼지 않는 분들도 있으나 역사적으로 보면 분열이라는 것이 가장 심각한 결과를 낳은 게 보통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적은 이런저런 분열이다.

분열과 대결이 있으면 불신.증오, 이런 것들이 수시로 나타나 결국 싸우게 되고 비참한 결과가 나온다. 조그만 분열의 씨앗도 사전에 배제하는 것이 좋다. 분열을 극복하고 대의명분에 맞는 정치를 함으로써 정치적 신뢰를 복구시켜 보겠다. 나중에 어떻게 평가받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역사적 평가를 못 받더라도 지역 구도 극복의 토대를 놓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

▶洪회장=짧은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지역 갈등 외에 좌우 이념 갈등과 경제 성장의 그늘에서 계층.빈부 간 갈등이 생겼다. 그런 갈등 구조의 밑바탕에는 한국전쟁과 광주민주화항쟁이 자리한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노력하면 많은 진전이 있으리라고 믿지만, 한국전쟁과 광주민주화항쟁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접근해 가면서 동학(東學)에서 말하는 해원(解寃)이랄까, 서로의 앙금을 해소하고 화합하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질 때 모든 갈등의 문제가 뿌리에서부터 치유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盧대통령=이념 갈등의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극복되지 않을까 본다. 동서 냉전 체제나 이념적 대결 구도가 세계적으로 해체되면서 점차 나아질 것이다. 남북 관계도 잘 대처해 나가면 점차 극복될 수 있다. 내가 더 걱정하는 것은 한국전쟁의 앙금보다는 남북 간 경제적 수준의 격차, 사회 체제와 그에 따른 인식의 격차다. 이념 대립이 없는 사회도 빈부 격차가 심각해지고 그 고통이 커지면 갈등이 벌어진다. 남북 관계는 이미 그런 불씨를 안고 있다. 멀리 내다보고 그런 갈등이 폭발하지 않도록 사전에 준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洪회장=그런 갈등 구조와 아픔의 해원이란 문제를 놓고 볼 때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대해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

호남 출신으로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과업을 이룬 대통령이었던 만큼 지역주의와 이념 갈등 문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문제를 대승적인 만델라 방식으로 해결해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큰 인물이었음에도 이루지 못했다. 지역주의 문제만 해도 盧대통령에게 이 문제가 넘어왔다는 것 자체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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