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사건 수렁서 깨어나 새출발합시다 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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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난 두달 가까이「지존파」.온보현(溫保鉉)사건과 성수대교붕괴.충주호유람선 화재사건등 잇따라 발생한 대형 사건.사고는 온 국민에게 깊은 실망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그러나 언제까지 흥분하고 탄식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침체된 사회 분위 기를 새롭게하고 정부와 시민들이 이를 재도약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신발끈을 다시 조여맬 때다.그동안 국제경쟁력 강화나 남북경협등 우리를 둘러싼 국내 안팎의 산적한 문제들은 우리 주변에 여전히 쌓여있다. 힘찬 재출발에 앞서 이번 일 이 우리에게 남긴 문제점과 교훈은 무엇이며 또 정부와 국민이 앞으로 해야할 일은 어떤것들이 있는지 좌담회를 통해 진단해본다.
[편집자註] ▲김원일씨=「지존파」.온보현(溫保鉉)사건과 성수대교붕괴등 하루 자고 나면 깜짝 놀랄 사건.사고가 잇따라 일어나 충격이 너무 컸습니다.온 국민이 아직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두달 가까이 흘렀으나 과연 그동안 정부와 국민의대응은 적절했는지,또 문제점과 교훈은 무엇인지 제대로 살펴보고넘어가야 합니다.
▲박정희회장=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우리 사회의 잘못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겁니다.「지존파」사건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남을 제치고 올라서면 된다는 식의 극단적인이기주의를 잘 드러낸 사례 아닙니까.아무리 자본 주의사회라지만있는 사람들이 자제하지 않고 과소비등을 통해 자기과시에 급급한데 대한 불만이 팽배한 것이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리가 무너진 것도 따지고 보면 원칙을 안지킨데 문제가 있지않을까요.용접을 잘못하고,불량 시멘트를 쓰고,설계대로 안하는등어느 것 하나 원칙을 따른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차경수교수=앞으로 빨리빨리 하려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서둘러서 열개 만드는 것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어야 합니다.국민들 역시 당장 효과가 없어도 이런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야 성수대교 붕괴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겁니다.
집 부근에 동호대교가 있는데 다리 양쪽에 배수구가 있어도 구멍이 흙으로 막혀 물이 빠지지 않아요.시간이 흐르면 콘크리트와철근이 썩을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시장등 윗분들이 바삐 움직이며 야단친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삽으로 흙을 퍼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작은 일이지만 자기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며 진정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야 제대로 움직이는사회가 됩니다.이런 사람을 길러내기 위한 인성교육이 여태껏 이뤄지지 않은 데 대한 사회적인 반 성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또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다리 붕괴는 그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金=잇따른 사건.사고는 애써 가꿔온 사회공동체가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에 충분합니다.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듯 가정이든 학교든 그릇된 경쟁에 치우친 교육풍토가 이같은 부작용을 낳은 것입니다.인명경시풍조와 함께 불법.탈 법.편법을 가리지 않고「돈만 벌면 된다」는 비뚤어진 생각은 바로 이 사회가 가르쳤습니다.결국 눈에 확 띄고 겉만 번지르르하면 된다는 적당주의와 전시효과에 급급했던 과거 군사정권이 민족 고유의 공동체의식과 도덕윤리를 망쳤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앞서의 두가지 유형의 대형사건.사고에서 우리 사회는 참된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이제는 하루빨리 충격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국가경쟁력을 키우는 일도그렇고 본격적인 남북경협(南北經協)에 대비해야하 는등 앞으로 할 일이 태산같습니다.
▲車=개혁을 하더라도 현장중심의 개혁이 필요한 시대입니다.어깨에 띠를 두르고 도덕성 회복을 외치는 따위의 행사 위주나 말위주의 개혁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국민 개개인이 자기 자리를 지킬 때만이 이 사회가 부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모두가 뼈저리게 느꼈을 겁니다.권력을 가진 사람 못지않게 용접을 하고 나사를 하나하나 조이는 사람들의 역할이 얼마나중요한지 우리는 눈으로 보았습니다.다리 준공식때 TV화면에 얼굴이 나오고 테이프를 끊는 지체높 은 사람보다 시멘트를 적절히배합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사회적 기여도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것이지요.
▲朴=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을 사회에서 끌어안는제도도 시급히마련돼야 합니다.최근의 불행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남긴 또 하나의 교훈 아니겠습니까.결손가정의 아동이나 미진학 청소년의 경우상급학교 진학이 안되면 갈 데가 너무 없어요.
조그만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이를 수용해주고 지도해 줄 곳이 없다는 얘기지요.그런 점에서 中央日報가 펼치는 자원봉사활동은 좋은 창구가 되리라 믿습니다.자원봉사자들이 결손 청소년의양부모가 돼 이들을 돌봐주고 따뜻하게 받아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金=이제까지의 사건.사고들을 거울삼아 앞으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정부는 정부대로,시민은 시민대로 할 일이 따로 있다고 봅니다.매년 8~10%의 경제성장을 기록하며 삶의 양(量)은 풍족해졌지만 그에 비례하는 삶의 질(質)은 이에 못미친게 사실입니다.선진국 몇 나라를 빼면 우리의 생활수준은 높은 편입니다.그러나 상대적인 빈곤감은 예전보다 커졌으면커졌지 줄어들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朴=좋은 문화를 만드는 방법은 먼데 있지 않습니다.무엇보다청소년이 건전하게 자라도록 가정에서부터 지켜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량만화.저질비디오게임.음란 PC통신등 청소년이 봐선 안되는 내용이 버젓이 나돌아 다니고 있는데도 속수 무책입니다.가정에선 부모가,학교에서는 교사가,사회에서는 시민단체가 발벗고 나서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청소년의 교육과 윤리를 다시 가르쳐야 할 때입니다.
***정직.도덕성 키워야 ▲金=그런 점에서 사치성 소비문화와순수문화는 구별돼야 합니다.압구정동의 오렌지족.야타족등이 있는한 건전한 청소년문화는 발붙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이들의 하루용돈이 한달간 열심히 일한 공원의 월급과 같아서야 설득력이 없습니다. 물질만 추구하는 사회에서는「문화가 밥먹여 주나」하는 빈정거림이 나옵니다.정직하고 도덕적인 시민을 만드는 길만이 청소년의 탈선과 범죄를 막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똑똑한 애」만 만드는 지금의 사회환경을 바꿀 수 있는 쇄신책을 만들 기 위해 정부와 사회가 지혜를 짜내야 합니다.
▲朴=똑똑한 애에 대한 시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무엇인가 창조적인 방향보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무조건 달달 외는 아이는 곤란합니다.남을 이기고 올라서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가 정말 똑똑한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집에서 공부만 잘하면 다른것을 못해도 좋다는 식으로 부모들이 아이를 키우니 사회질서에 대한 기본인식이 있을리 있습니까.자원봉사등을 통해 남을 생각하고 도울줄 아는,다시말해 민주 시민으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는데 교육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그 리고 이런 사회봉사활동을 내신성적에 적극 반영하는등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미국하버드대의 경우 사회활동 경력이 없으면 입학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복지 발전 시급 ▲車=그렇습니다.자원봉사나 사회봉사활동을 통한 국민의 일체감이 중요합니다.사회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때 비로소 일체감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지난해 미국 전국민의 65%가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했고 사회복지시설 등에 낸기부금이 1인당 평균 8백80달러(약 70만원)에 이른다는 언론보도 내용을 보고 느낀 바가 많습니다.
우리도 시민단체 외에 교수협의회등 여러 민간단체가 나서서 사회적인 일체감을 형성하는데 힘을 보태야 합니다.정부도 필요할 때만 반짝 관심을 보이지 말고 지속적인 관심을 쏟아야 하고요.
지금까지 이에 대한 연구보고서가 많이 나온걸로 압 니다.정부가눈여겨 보질 않으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국민이 사회에 진정 고마움을 느끼고 일체감을 갖게되는지,또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모르지요.미국에서는 개인주의가 심하다 해도 사회가 개인을 도와주니 개인은 또 사회를 위해 일할 마음의자세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우리는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우리도이런 제도를 빨리 정착시켜야 합니다.미국에서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한 사람에게 대학 입학때 점수를 많이 주는 이유가 있습니다.시간을 많이 빼앗 긴 만큼 대학에서 이를 보상해 줘야한다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있기 때문입니다.
▲金=中央日報가 펼치는 르완다 난민돕기 캠페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봅니다.남을 돕는 삶,이웃을 생각하는 생활자세야 말로 문화성장을 이루는 기틀입니다.경제성장만의 절름발이 성장이 아닌 문화성장과 같이 가야 균형잡힌 사 회가 되며,봉사정신을 누누이 강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대형사건.사고의 이면에는 불균형적인 성장에 따른 위험성이 이미 내포돼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공업고등학교 졸업생이 1백% 취업할 수 있음에도 절반 이상이 진학반을 택해 대학가기를 원하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대졸과 고졸간의 임금 격차가 좁혀지고 있지만 의식은 바뀌지 않고 있는 겁니다.사회가 정당한 대우를 안해주니 자라나는 세대는 자신들이 애써 배운 기술을 포기하고 있습니다.왜곡된 사회에 자신의 몸을 끼워 맞추는 이런 가치관 혼란이 계속되지 않도록 정부와 사 회가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한국이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할때 일본은 두번째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우리사회에 만연된 성장수치에서 벗어나 문화.사회복지쪽의 발전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車=정부도 원칙대로 해야 국민이 따릅니다.현실에 맞지않고,더욱이 따를 수 없는 규정을 만들어 놓고 하라고 하니 편법이 나오고 눈치를 보는것 아닙니까.여기에는 물론 사회적인 식견과 문화가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다리를 하나 세운다 고 칩시다.
돈과 시멘트.기술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다리를 만들기 위한 그 사회의 식견과 문화가 합쳐져야 좋은 작품이 나옵니다.압구정동 아파트 한 채가 10억원대면 뭐합니까.주민들이 모여 잔디등 주변환경 을 가꾸려는 마음가짐과 행동이 없다면 시멘트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근면성.교육열 자부 ▲朴=이럴때 일수록 국회의원등 정치인이 나서 국민이 힘을 합쳐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당리당략 차원에서 국회를 공전시키거나 상대방을 헐뜯는 등의 모습은 보기 안좋습니다.침체된 사회분위기를 끌어 올리는 등 생산적인 대안을 내야 할 때입니다.
▲金=연이어 터진 사건.사고가 국민 모두에게 시련을 준 것은사실입니다.그러나 우리 국민만이 가진 근면성.성취욕.교육열등은아직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올림픽 개최를 통해 한국의 위상을 높였고 뛰어난 예술인등이 해외에 서 국위선양을 하고 있습니다.뒤숭숭한 사회분위기와 아픔을 떨쳐내고 새롭게 출발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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