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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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상원이에 대해서 말하는 건 쉽지 않다.왜냐하면 워낙에 말이 없는 녀석이라 그 마음 속을 제대로 헤아리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은 고3 2학기의 어느날이었는데- 늦가을 아니면 초겨울이었으니까- 상원이하고 둘이 대신동의 어느 언덕길을 걸어오르던 중이었다.영석이가 생일잔치를 한다고 해서 오랜만에 영석이네 집에서 모이기로 한 날이었는데,나하고 상원이가 조금 늦게 그리로가던 길이었다.아마 한 8시쯤 된 저녁시간이었을 거였다.
우리 앞으로 한 아낙네가 아이 하나를 업고 또 한 아이는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몹시 비틀거리는 게 완연했다.엄마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그러면서 울다가 말다가 하면서 엄마를 뒤따르는 꼬마 계집애는 서너 살이나 됐을까 싶었다 .
『아주머니 어디 아프신 거 아닙니까.』 상원이가 느닷없이 몇발작을 서둘러 가서 아낙네를 잡아주며 물었다.아낙네는 우리에게관심없다는 듯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는데,술냄새가 화악풍겼다.내가 상원이에게 그냥 가자는 눈짓을 보냈다.상원이는 눈을 몇번 끔뻑이며 생각하 는듯 하더니 다시 아낙네에게 다가섰다. 『아주머니가 넘어지면 등에 업은 아이가 크게 다칠지도 몰라요.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요,제가 꼬마를 안고 가면 어떨까요.
우리가 집까지 모셔다드리고 갈게요.이 동네 사시는 분인 것 같은데요.』 아낙네가 휑 뚫린 눈빛으로 우리를 잠깐 주시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돼.우리 아길 잃어버리면요… 난 어떡하라구요.』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에는,서너 살 먹은 꼬마 계집애의 손을 이미 상원이가 쥐고 따라가고 있었다.상원이가 계집아이의 손을 내게 맡기고,아낙네의 등에 업혀 있던 갓난아이를 품에 안았다.아낙네는 앙탈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얘엄마라 고는 하지만 스물둘 아니면 셋쯤이나 됐을 것 같은 젊은여자였는데 생활에 쪼달리고 있다는 게 온몸과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둘 다 계집앤가 봐요.이쁜데요.』 『오늘은 내 생일이라서 시장에 갔다가 술을 좀 마셨거든요.슬프잖아요.난 서울에 아무도없거든요.애들 아빠라는 사람은 바람피우고 다니구요,내가 뭐라 그러면 때리구요… 내가 딸만 낳는다구요,시집에서도 절 싫어하구요… 다음엔 꼭 아들을 낳아야 할텐데… 흐흐윽….』 우리는 그날 울다 말다 하는 젊은 아낙네를 아낙네의 좁은 단칸방까지 모셔가서 아이들을 자리에 누여주고 영석이네 집으로 갔는데,상원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덕순이가 상원이에게 반했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상원이에게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보물같은 심성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어쨌든 상원이는 2차 수능시험 점수가 발표된 12월 직후부터재수를 결심했고 1월부터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덕순이는 마침내 이화여대 철학과에 합격했는데 그 뒤로는 비가 오는 날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상원이네 학원 입구에서 상원이를 기다린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상원이가 덕순이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는 소문에 나와 있지 않았다.말없이 받쳐주는 우산을 마다할 재주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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