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선 시민혁명이 '국민 재판' 길 열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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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 12면

일러스트=강일구

민주주의 역사가 투쟁의 역사라고 한다면, 배심제의 역사도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역사에서 사법을 인권의 최후 보루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법의 핵심에는 배심제가 있다.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나 법정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배심제는 법률로 도입된 것이 아니었다. 점진적으로 발전한 역사의 산물이다.

배심제의 역사

11세기 이전에 이미 영국에 존재하였다는 견해도 있으나, 1066년 노르만족 윌리엄 1세의 영국 정복과 함께 수입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12세기 영국의 국법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헨리 2세는 배심제도를 발전시킨 인물로도 유명하다. 왕이 파견한 재판관이 지방에서 재판을 할 때 지방사정에 능통한 유력자 12명을 소집해 인명, 토지, 건물, 수확량 등에 대한 조언을 구하였던 것이다. 초기의 배심제는 일종의 자문기관이었다.

12세기까지 형사재판에서는 ‘시련에 의한 재판(trial by ordeal)’이 인정됐다. 피고인을 고문하거나 물에 빠뜨려 생존하느냐의 여부로 유·무죄를 판단했던 것이다. 1215년 로마교황 이노센트 3세는 ‘시련에 의한 재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점차 배심원들이 형사재판의 유·무죄를 판단하게 되었다. 배심원이 자문기관에서 판단기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14세기께에는 배심원의 만장일치에 의한 평결이 본격화했고, 15세기까지는 ‘배심에 의한 재판(trial by jury)’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정작 배심원 자신은 고문이나 협박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배심원이 유죄의 평결을 내릴 때까지 권력자와 재판관은 배심원을 장기간 감금하고 음식을 주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1670년 부셸(Bushell)사건은 이러한 악습이 바뀌는 데 결정적 전기가 됐다. 퀘이커교의 지도자 윌리엄 펜은 종교 자유와 관용의 옹호자였다. 1670년 8월 14일 영국 런던에서 펜이 수백 명의 군중 앞에서 종교의 자유를 주창한 뒤 펜과 동료가 체포돼 폭동선동죄로 기소되었다. 배심원들은 펜에 대해 유죄평결을 내리기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배심원들은 2박3일 동안 음식이나 음료수도 없이 감금됐으나 끝까지 무죄평결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러자 벌금을 납부할 때까지 징역형에 처해졌다. 부셸을 포함한 4명의 배심원은 벌금납부를 거부하고, 인신보호영장을 청구하여 구금에 이의를 제기했다. 항소법원 수석재판장 존 보그핸은 “배심원은 독립적 판단기관으로 판사도 배심원에게 명령할 수 없다”고 밝히면서 이들을 석방했다. 이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배심원은 판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립적으로 평결할 수 있는 권리가 확립됐다.

대영제국의 확장과 함께 영국의 배심제도 아메리카·아시아·아프리카 등으로 확대되었다. 식민지 미국에서도 배심제도는 일찍이 도입됐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인에게 배심재판을 받을 자격을 주지 앟않거나 영국으로 이송해 재판했다. 미국인들은 자연스럽게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배심재판에 의지하고, 신뢰를 갖게 됐다.

1789년 제정된 미국헌법 제3조 제2항은 “모든 범죄에 대한 재판은 탄핵을 제외하고 배심에 의한다”고 못박고 있으며, 1791년의 수정헌법 제6조와 제7조도 배심제를 규정하는 등 헌법 3개 조문이 배심제에 관한 것이다. 배심제는 점차 영국보다 미국에서 애용됐다.

유럽에서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에 의해 배심제도가 도입됐다. 프랑스, 라인란트, 벨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의 몇몇 주,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에서는 중요한 사건이나 정치적 사건에 배심제를 채택하게 됐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유럽에서 배심제는 점차 사라지거나 참심제와 같은 변형된 형태로 존속했다. 1835년 토크빌이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의 배심제를 찬탄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연방제인 미국에서 배심제도는 주마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언제나 공정한 배심원이 구성된 것도 아니었다. 1968년 덩컨 대 루이지애나 주(Duncan v. Louisiana) 사건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은 “배심제를 규정한 수정헌법 제6조는 각 주의 형사소송에도 적용된다”고 판결했다. 공정한 배심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가 헌법적 권리로 인정된 것이다.

1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배심제가 21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인가. 스페인에서는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배심제를 도입하고, 독재정권이 장악하면 배심제를 폐지하는 수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1995년부터 다시 배심제를 시행하고 있다.

러시아도 소비에트정권이 막을 내린 후 1993년 배심제를 부활시켰다. 민주화가 진행 중인 남아메리카에서도 아르헨티나 등이 배심제를 도입했다. 국민이 성숙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면 21세기에도 배심제는 건재하지 않을까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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