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변 사라진 유세 현장 … '감성 대화'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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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붉어진 얼굴로 청중을 압도하는 웅변형 유세를 이번 대선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유세장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청중과의 눈맞춤이 강조된다. 이른바 대화형 유세다. 방송 CF와 홍보 동영상, 로고송에 등장한 '고객 감동과 감성 바람'이 유세전에 영향을 미쳤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27일 대전 으능정이 거리, 28일 천안버스터미널 앞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유세를 펼쳤다. "거기 햄버거 가게 앞 아저씨! 노래방 간판 뒤 아가씨! 제 말이 맞죠? 정권 교체하려면 2번 찍어야겠죠?" 천안 유세에서 찬조 연설자들이 목청을 높이는 와중에 단상의 이 후보는 승리의 'V'자를 그리며 터미널 2층의 커피숍.미장원 손님들과 쉴 새 없이 눈을 맞췄다.

"요 옆에 재래시장에서 장사하는 분, 자영업 하는 분, 저기 미장원 하는 분, 저 위에 피부과에서 일하시는 분~. 모두들 장사 안 되시죠? 얼마나 장사가 안 되면 음식점 하는 분들이 솥뚜껑을 전부 나와서 던집니까?" "난 재래시장 가는 게 제일 두려워요. 왜냐? 과거에 잘난 사람들이 시찰 나오면 '장사 잘된다'고 무조건 얘기했어야 했거든요!"

이 후보가 애초에 이 같은 생활 밀착형 표현을 선호한다면,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이런 방식으로 변신한 경우다.

과거 정 후보의 연설은 격정적이고 화려했다. 하지만 정 후보는 27일 첫 대전 유세에서 "이제 웅변은 안 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그런 뒤 "내가 말로 하면 부드러운데 TV에 나오는 10초 동안은 사납고, 고약하고, 정 떨어지게 나온단다"고 실토했다.

정 후보는 유세 때마다 "여러분의 두 눈을 똑똑히 보고 있다. 가슴속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며 청중과 눈을 맞추는 소통형 유세로 컨셉트를 바꿨다. 그런 와중에 '저 정동영이가~'로 시작했던 화법은 어느새 '제가~저를~'로 바뀌었다. 이어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 평화시장 옷 장사 시절, 해병대 복무 중인 아들 이야기, 못 배운 동생 이야기가 등장한다. 유세 시간을 줄이는 대신 그가 시작한 '안아 주세요' 캠페인도 딱딱한 정치인이 아닌 '장남처럼, 효자처럼' 접근하겠다는 발상이다.

이회창 무소속 후보의 변신도 흥미롭다.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시종일관 높은 톤을 유지했던 1997년과 2002년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의 언어는 '웅변가의 언어'에서 '보통 사람의 대화체'로 변모했다. "과거에 얼마나 오만했는지 알게 됐다"거나 "한나라당 후보 땐 상석에 앉았지만 이번엔 번호도 꼴찌고, 자리도 꼴찌다"란 동정심 유발 작전도 등장한다. "사진보다 실물이 못 해서 미안하다" "돈이 없어 유세 차량을 못 구해 출정식이 늦어졌다"는 유머도 '달라진 이회창'을 상징한다.

옷차림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이명박 후보는 캐주얼 반코트에 목도리를 두른 '욘사마 스타일', 법관 출신의 이회창 후보는 짙은 파란색 점퍼의 '동네 아저씨 차림', 정동영 후보는 노타이에 주황색 털스웨터와 점퍼를 입는 따뜻한 스타일을 선호한다.

명지대 김형준(정치학과) 교수는 "민주화와 같은 거대담론이 지배적 이슈였던 과거 선거와 달리 생활정치가 강조되고, 유세가 아닌 다른 홍보 채널이 많이 등장한 때문에 후보들의 어조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고 분석했다.

목이 잔뜩 쉰 이명박 후보처럼 후보들의 체력 안배 노력이 '조용한 유세'를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서승욱.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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