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영화] 나쁜 놈 위에 더 나쁜 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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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면

감독: 정길영
출연: 오만석 이선균 류덕환
장르: 스릴러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서울 변두리 어느 동네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마치 전시라도 하듯, 죽은 이의 양팔을 벌려 철봉에 묶어놓았다. 같은 수법으로 이번까지 이 동네에서 모두 네 차례의 연쇄살인이다. 곧이어 다섯 번째 살인극이 관객의 눈앞에서 벌어진다. 자연히 관객은 그 범인이 누군지 안다. 앞서 네 차례 살인의 범인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일찌감치 범인을 알려주다니, 전형적인 스릴러의 방식은 아니다. 아무래도 이 영화가 좇는 것은 범인만이 아닌 것 같다. 대신 사건을 둘러싼 세 남자의 불행한 성장기가 조금씩 등장한다. 사건을 맡은 형사 재신(이선균)과 그의 죽마고우이자 추리소설이 안 팔려 생활고에 내몰린 작가 경주(오만석), 그리고 겉보기에 얌전한 미소년이지만 내면은 잔혹하기 짝이 없는 동네 문방구 주인 효이(류덕환)다.

‘우리동네’는 이야기감을 꽤 풍성하게 갖춘 영화다. 세 남자의 과거사를 줄거리로 간추리자면 저마다 꽤 긴 분량이 될 만큼 사연이 기구하다. 서로가 의식하지 못했던 묘한 인연도 숨어 있다. 악하고 독한 인연이다. 그 인연의 연장에서 등장하는 ‘모방범죄의 모방범죄’라는 이중장치도 새롭다.

반면 이 이야기를 펼쳐가는 솜씨는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관객에게 미리 언질을 주는 일 없이 그때그때 필요한 대목을 덧붙이는 방식이다. 세 남자의 과거사야 그렇다고 쳐도, 연쇄살인의 공통된 특징까지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쪽에서 필요할 때 비로소 알려준다. 이래서는 새로운 스릴러라는 장점보다 스릴러의 기본이 누락된 스릴러라는 단점이 더 크게 보인다.

새로운 스릴러로 평가한다면, 그 초점은 이 영화가 범인이 누구인지 보다 범인이 왜 살인마가 되었나를 더 보여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세 배우의 연기는 고르게 호흡이 맞는다. 섬뜩한 이중성을 지닌 사이코패스 효이, 공격적이고 충동적인 경주, 낙천적인 기질에서 출발해 치명적인 딜레마에 빠지는 재신을 세 배우는 저마다 큰 무리 없이 소화한다. 다만 이런 인물형을 축조하는 방식이 앞서 지적한 대로, 덧붙이기형 평면적 서술에 의존하는 것은 역시나 아쉬운 대목이다. 강렬한 시각효과로 시작한 영화의 힘은 캐릭터의 입체감으로 뒷받침되지 못한 채 점점 맥이 빠지는 듯 느껴진다.

‘우리동네’는 전형적인 스릴러와는 다른 길을 가고 싶은 욕망과 연쇄살인범이라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얼굴을 탐구하고픈 욕망 사이에서 퍽 모호한 영화가 된 듯 보인다. 새로운 스릴러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기본을 충족하는 스릴러를 만드는 것도 충무로에서는 아직까지 완수되지 않은 숙제인 것 같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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