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12.12사태 왜 기소유예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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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0.26」으로부터 시작해「12.12」「5.17」,그리고 「5.18」은 1979년의 가을에서부터 1980년 초여름까지 한국사회의 긴박했던 정국을 상징하는 사건들이다.그 숫자들에서 착검한 얼룩무늬 군인들,탱크행렬.안개같은 정국과 그 뒤편 음모의 냄새를 맡는다.
이 시기는 여러 건의「내란죄」판례를 법학도들에게 제공하고 있다.우선 10.26의 주인공 김재규(金載圭)는 내란죄로 단 6개월만에 재판을 받고 확정된 지 3일만에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이 사건에서「대통령직에 있는 자연인을 살해한 것인지,국헌을 문란케할 목적으로 살해한 것인지를 가릴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 6명은 모두 곧바로 옷을 벗게됐고 이 가운데 일부는 서빙고로 끌려가 고초까지 겪었다.
이 시기에 나오는 또하나의 판례는「김대중(金大中)내란음모사건」이다.국민들의 열화같은 민주화 요구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던「안개정국」은 학생들의 시위를 격화시켰다.군부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이른바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를 취하면서『김 대중과 그 일당이 배후에서 사주해 내란을 획책했다』고 발표하고 이들을 구속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후 국회의 5共청문회를 통해 조작임이 밝혀졌다.학생시위와 김대중과의 연결고리가 없었으며 더구나학생들은 폭력적인 시위를 자제하고 있었으며 비상계엄은 여야가 함께 해제를 요구하고 있던 중이었다.
김재규와 김대중을 내란죄의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내란죄를 범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이 제3의 「내란죄」사건은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前대통령을 필두로 하는 이른바 합수부측 또는 신군부측이 12.12사태를 통해 당 시의 계엄사령관인 정승화(鄭昇和)육군참모총장을 강제연행하고 대통령을 압박해 사후재가를 받음으로써 국헌을 문란케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제 공소시효 15년을 한달여 남긴 이 시점에서 신군부의 당시 행위는 군형법상의 반란죄는 성립하지만 대통령등으로서의 공헌을 참작해 기소유예처분하고 내란죄는 무혐의 처리한다고 발표했다.가장 절묘한 타협으로 선택된 방안인 것 같지만 이 발표는 쌍방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었다.무엇보다「사안 경미하고 합의 되었으며 깊이 뉘우치고 있는 잡범」들에 대해서나 하는 기소유예를 법정형이 사형인 초중량급「국사범」에게 적용한다는 것이넌센스다.더구나 피해자들을 향해 무 고라고 맞고소 하는등 이들에게 일말의 뉘우침도 볼수 없으니 기소유예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들의 행위는 분명 반란죄를 넘어선다.반란을 왜 일으켰던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서막이 아니었던가.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자료들은 이미 12.12이후 5.17 계엄확대,광주 진압,국보위 설치,통일주체국민회의의 전두환대통령 선출에 이르기까지일련의 과정이 신군부의 노골적이며 주도면밀한 권력장악의지를 분명히 증명해주고 있다.그것은 국헌의 문란이며 한지방의 평온을 해치는 정도를 넘어 명백하고도 가장 전형적인 내란죄였던 것이다. 현정부는 12.12를「하극상의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어떤 호사가는 그런 규정을 한 정부는「문민적 정부」일 수밖에 없다고 되받았다.검찰은 문민「적」정부의 규정을 충실히 이행해 하극상 사건으로 법률적 결론을 맺었다.이에 항고 해 재수사할 여유도 별로 없고 법정에서 심리할 기회는 더욱 없다.그렇다고 우리 역사속에 어둡고 쓰라렸던 한 페이지가 고이 닫혀지리란보장은 없다.오히려 이 어정쩡한 처분은 더욱 큰 갈등과 분쟁,숙제의 큰 응어리를 우리 사회에 드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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