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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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우리의 기발한 작전은 한치의 실수도 없이 수행되었다.
그 금요일 밤에 우리는 축배를 들며 낄낄거렸다.우리는 사실 서로 무공훈장이라도 달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우리는 가만히 있는 상대를 못살게 굴지는 않지만 우리를 못살게 구는 상대에 대해서는 우리의 자존심을 걸고 가차없이 응징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랬기에 우리는 반성하거나 후회하지는 않았다.덕순이네가 상원이에게 한 짓은 아주 야비한 짓이었고,우리 악동들을학교에서 추방하려고 들었던 건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짓이라고 우리는 단정했던 거였다.
문제의 금요일 밤이 지나고 새벽이 지나고 토요일 아침이었다.
덕순이와 현주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어쩌면 그애들 엄마들이 확인해본다고 산부인과에 데리고 갔는지 모른다고 영석이가 그랬다.
혜숙이는 학교에 나오긴 했는데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집에서 어지간히 닦달을 당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철저하게 오리발 내미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우리는 당분간 교실이나 복도나 하여간 학교 안에서는 서로 붙어 있지도 말기로 하였다.그리고 함부로 웃지도 말기로 하였다.소위 표정관리라는걸 해 야 한다고 승규가 그랬다.그래서 우리는 겉으로는 세상이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마음 속으로는 낄낄거리면서 지냈다.
덕순이와 혜숙의 엄마가 교장실에 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건3교시 다음의 노는 시간이었다.내가 매점에 갔다가 교실로 돌아오는데 서무실에 있는 누나가 나를 불러세우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던 거였다.
『달수야 얘,또 무슨 일이 있은 거 아니니.』 『아뇨… 근데왜요?』 나는 누구에게든 허를 내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니,교장선생님한테 엄마들이 찾아와서 막 뭘 따지고 있는데말이야,내가 잠깐 차를 드리려구 들어갔는데 달수 니 이름이 나오더라구… 난 혹시 또 무슨 안좋은 일이 생겼나 하고 걱정했지뭐.아니면 다행이고.』 『어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서무실 누나에게도 철저히 위장을 풀지 않았는데 그러면서 사실 약간은 미안하기도 했다.그래서 계단을 오르다말고 다시 서무실 누나에게 다가가서 귓속말을 했다.
『우리가 좀 지나친 장난을 쳤거든요.계집애들이 워낙 못되게 굴었단 말이에요.나중에 다 알게 될 거에요.어쨌든 이건 비밀이에요.알았죠.』 교실에 돌아와서는 곧장 쪽지를 써서 긴급한 사태를 다른 악동들에게도 알렸다.승규의 쪽지가 돌아왔다.
「악동 일동은 품위를 잃지 말고 의연할 것」.
아니나 다를까,4교시가 끝나고 우리는 교장실로 호출당했다.
교장선생님은 우리를 한줄로 쭉 세워놓고 한동안 아무 말씀도 안하고 책상위의 무슨 서류들을 정리하고 계셨다.그러면서 또 적당한 예를 찾고 계신 건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쁜 녀석들,너희들 부모 심정을 생각해봤어?』 노처녀 교장선생님이 남의 말을 하고 계셨다.어쨌든 우리는 범행을 극구 부인하기로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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