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순례>20.춘향가中 쑥대머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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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나는 가끔 우리나라 근대 예원(藝園)을 통틀어 최고의 천재는아마 임방울(林芳蔚,1904~1961)이 아닐까 생각해 보곤 한다. 서정성과 극성을 완벽하게 조화해 내면서 우리 소리의 진수를 이룬 이가 임방울이다.그는 창가락 이외의 재담이나 덕담에의한 「아니리」의 익살과 잔 기교 같은 것을 철저히 절제하면서사설(辭說)위주의 절창으로 득음에 도달했다.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서울음반『임방울선집』)는 그의 소리 중 백미다.옥방에 영어(囹圄)의 몸으로 모진 매를 맞아 머리카락이 쑥대같이 헝클어진 춘향의 한은 그대로 일제하에서 설움과 통한(痛恨)에 젖은 우리 민족의 심회( 心懷)그 자체이기도 했을 것이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 찬자리에 생각나느니 임뿐이라 한양낭군 보고지고 오리정(五里亭) 정별후(情別後)로…』 이 애절한 서편제의 비가(悲歌)는 일제때 SP음반으로 나와 무려 1백만장이나 팔렸다 하니 어쩌면 그 시절 국민가요(國民歌謠)요,민족의 노래가 아니었을까 싶다.그 시절 우리 서민들은 포악한 남원부사 변학도를 일제 혹은 관(官)같은 수탈의 기관으로,옥방의춘향은 힘없고 불쌍한 민중 자신들의 삶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가객(歌客)임방울은 그 삶마저 비극적이었고 그의 소리 또한 완상용의 고답스러운 품위 같은 것보다는 듣는 이의 가슴에눈물을 적시우게 하면서 그 혼마저 서서히 휘감아 들이는 매력을뿜어내고 있다.어둡고 애틋한 단조성(短調性)에 걸걸 하고 감칠맛 나는 통성(通聲),그위에 휘휘 감기는 애원(哀怨)의 세성(細聲)….
예술의 길을 걷고 있는 내게 임방울의 소리는 스승이다.나는 밤이면 불을 끄고 「쑥대머리」를 들으면서 그림의 수를 배우곤 했다.얼마전 춘향이 마지막으로 이몽룡을 배웅했던 박석고개 오리정에 앉아 나는 다시 한번 임방울의 넋이 그 소리 를 타고 우리 산하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비운의 천재 임방울.
그가 10년 넘게 그림쟁이인 나의 내밀한 또 하나의 스승이 되고 있음을 그의 넋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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