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켈리 남성편력 폭로전기로본 화려한 일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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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그레이스 켈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지 올해로 12년.최근그녀의 깨끗한 겉모습 속에 숨어있는 화려한 남성편력의 이면을 낱낱이 드러낸 전기 『그레이스』가 영국출신 전기작가 로버트 레이시에 의해 출간돼 화제다.이 책은 『그레이스가 결혼하겠다고 집안에 이야기한 사람만 해도 50명은 된다』는 어머니의 말을 비롯해 가족.친구.목격자들의 상세한 증언을 바탕으로 씌어져 그레이스의 숨겨진 사생활을 벗기고 있다.남자의 욕정을 스크린상이아니라 실제로 도발시키며 살았던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요약.소개한다. [편집자註] 그레이스로 하여금 제대로 된 연기를 하게 만들고 스타가 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앨프리드 히치콕감독은 그녀를 가리켜 『(차가운)눈에 덮인(뜨거운)화산』이라고 표현한바 있다.이 말은 그녀의 차갑고 이지적인 외모의 뒷면에 숨겨진( 연기자로서의)변신력과 열정을 가리킨 것이다.하지만 그레이스의 실제 사생활은 히치콕의 이 말이 그녀의 깨끗하고 절제된 모습뒤에 남자에 대한 욕망이 숨겨져 있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그레이스가 18세부터 다녔던 뉴욕의 연극예술 아카데미 교사로그녀와 4년간 사귀었다는 돈 리처드슨의 증언은 충격적이다.『우리 둘은 학생들의 연기현장 여행중 마주쳤는데 불과 몇시간이 지나지 않아 서로 관계를 맺었다.그녀는 야전용 침 대위에서 나를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본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답고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첫 성경험이 아니다.17세때 친구 남편과의 사이에서 그녀는 이미 순결을 잃었다. 그녀와 함께 연극학교를 다니며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는 프랑스 출신의 알렉상드르 다르시는 『차갑고 절제된 인상에절대 그럴 것같이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사실은 남자의 손이 무릎에 닿으면 바로 안겨버리는 스타일이라는데 놀랐다』 고 술회하고 있다.
그레이스 켈리는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에서 함께 공연했던 남자배우들 대부분과 깊은 관계를 가져 왔다.
다소 거친 분위기의 미남배우 게리 쿠퍼와의 깊은 관계는 52년 그녀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며 출세작이랄수 있는 『하이눈』에서 함께 공연하면서 맺어졌다.당시 그녀는 23세였고 게리 쿠퍼는 51세로 부녀지간 정도의 나이차가 있었다.다 음 상대는 53년 거장 존 포드감독의 『모감보』에서 조연을 맡으면서 만난클라크 게이블.51세와 24세의 만남이었다.그녀는 이어 54년거장 앨프리드 히치콕감독의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에 출연하면서 49세의 배우 레이 밀런드를 만나게 된다.레이 밀런드는가정을 가진 유부남이었다.밀런드는 영국출신 부인에게 별거통고까지 받게되는데 둘은 할리우드의 아파트에서 본격적으로 동거생활에들어갈 채비를 한다.하지만 역시 켈리집안에 의해 보기좋게 거절당한다.그녀는 마음 껏 바람을 피웠지만 결혼만은 신중했던 것으로 보인다.가족관계를 중시하는 아일랜드인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인가. 이는 그녀가 소속됐던 MGM영화사가 나서 거액을 투자해 상품가치를 키워놓았던 그녀의 이미지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하다.MGM은 홍보력을 총동원해 스캔들이 새나가는 것을 막았다.이런 일을 겪고도 그레이스에 대한 나쁜 소문이별로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이 그녀의 마지막 스캔들은 아니었다.
그녀는 같은해 가수 겸 배우 빙 크로스비와 사귄다.하지만 이관계는 육체관계를 동반하지 않은 순수한 사이였다.54년 빙 크로스비와 같이 공연한 『갈채』를 통해 그녀는 54년도 아카데미여우주연상을 거머쥐고 스크린의 정상에 이른다.
이번에는 켈리가족도 결혼에 동의했다.그러나 그레이스 자신이 마음을 바꿨기 때문에 둘의 사이는 결혼으로 연결되지 못했다.빙크로스비의 친구인 윌리엄 홀덴이 그 사이에 파고든 것이 원인이었다.그와는 한국전을 소재로한 영화 『도곡리 다 리』를 통해 만나 짙은 정사장면을 찍는 사이 현실로도 한몸이 돼버린다.
다음해인 55년은 운명의 해였다.칸영화제 참석 및 히치콕의 영화 『도둑 벼락부자』촬영차 케리 그란트와 함께 남프랑스 리비에라 해변에 갔다 인근 모나코의 왕궁에 초대된 것이다.이것이 다음해 4월18일 결혼하게 될 레이니에공과의 첫만 남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칸영화제에서 만난 프랑스 배우 장 피에르 오몽과의 염문이 널리 퍼져있었다.하지만 레이니에공은 자신의 영지 바로 옆에서 벌어진 이 행각을 포함해 그레이스의 그간의 엽색행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그레이스 가 미국에 간후 끊임없는 구애편지를 보내던 레이니에공은 55년 12월15일 청혼을 위해 미국에 도착하고 이듬해 1월5일 그레이스의 부모를 만나 결혼을 허락받는다.
그해 4월 그레이스는 결혼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는 배에 몸을실으면서 미혼여배우로서의 남성편력에는 일단 종지부를 찍는다.
하지만 이것이 그레이스가 펼친 사랑행각의 마지막은 아니다.결혼후 왕비역할에 적응을 못해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레이스는몇번의 유산 끝에 딸과 아들을 낳고 일단 평화스러운 가정을 이룬다. 아무것도 몰랐던 레이니에와 나이가 들면서 불화가 생기기시작했다.그레이스에 대해 새로운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혹은 간혹 모나코에 초청돼오는 할리우드 배우들과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목격한 때문일 수도 있다.
결혼생활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다웠던 그레이스는 이런 불편한 상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몇몇 젊은남자들로부터 위안을 받음으로써 풀려고 했다.다시 젊었을 때의 버릇이 나타난 것이다.그녀는 특히 16년 연하의 젊은 남자와 지속적으 로 깊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이런 행동은 레이니에와의 불화를 더욱 부채질해 급기야 82년 그녀의 교통사고 사망이후 암살설과 사고후방치설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蔡仁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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