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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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덕순이로 말할 것 같으면(우리는 사실 떡순이라고 불렀다),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정서불안 끼가 좀 있어서 그렇지 사실 그렇게 못난 것도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게다가 활달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어느 정도 붙임성도 있어서 항상 몇명쯤은 패거리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잘은 모르겠지만 어딘가에 여자로서의 매력도 있는지 몇몇 놈들은 덕순이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덕순이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표시나지 않는 짝사랑만이 가능했다.만약 그 짝사랑이 덕순이 자신에게 알려질 경우에는 단단히 각오를 해야만 했다.결과적으로는 덕순이라면 치를 떨게 될 각오말이다.아마도 덕순이의 정서불안 증세의 일부일 테지만,하여간 덕순이는 자신을 누군가가 짝사랑한다거나 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았다.
『야 니 주제를 알아야지,뭐 밤마다 나를 꿈꾼다구? 어이구 수작부리지마.야 연애편지 쓸 시간이 있으면 공부나 해.머리가 썰렁하면 노력이라도 남보다 더 해야지.하여간 너… 밤에 내 생각하면서 이상한 짓하구 그러다간 오래 못살줄 알라 구.』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덕순이에게 편지 한번 잘못 전했다간 교실에서대놓고 이렇게 당하기 일쑤였다.그래서 결국은 대개 덕순이 같은계집애에게 연정을 품었던 일에 대해서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는 거였다. 그렇지만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덕순이가 특별히 상원이나 우리 악동들에게 악심을 품을 일은 없었으니까.우리 중의 누구도 덕순이를 짝사랑하거나 할 일은 없었으므로.
덕순이는 하필이면 우리 중에서도 가장 순정파인 상원이를 타깃으로 삼았다.상원이가 정화를 생각하면서 애태운 일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그걸 가지고 상원이를 병신처럼 만든 거였다.그래서 나는 사실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오 하느님,떡 순이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상원이 걔 꼴값 아니니.글쎄 무조건 정화네 집으로 쳐들어갔다는 거야.웃기지 않니.달밤에 이별식도 했다는 거야.정환지 고년도 돌았지.어이구 동네방네 여학교 계집애들을 실컷 쫓아다니다가 망신만 당한 놈하고… 글쎄 이게 말이 되는 소 리니.하기야누가 알겠어.떠나기 전에 한번 인심쓰고 간건지….』 더없이 좋은 수다거리를 만난 계집애들이 졸지에 귓속말들을 주고 받았고,상원이를 한번씩 쳐다보면서 킥킥거리거나 한번씩 이유도 없이 괜히 쏘아 보았고,그러니 상원이가 충분히 열받을 만했다.상원이의정화에 대한 진지한 심정을 알았더라면 덕순이는 자기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았을 거였다.
어쨌거나,건의서 파문은 그런대로 별 탈없이 수습되었다.반박문이 한 역할을 단단히 했고,선생님들도 덕순의 정서불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그렇다고우리가 그걸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이건 우리 악 동들의 명예에관한 문제였다.
우리는 덕순이네 패거리를 응징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안을 검토했는데,이번에도 승규가 제안한 기발한 아이디어에 찬탄을 금하지않을 수가 없었다.우리는 덕순이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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