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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386 비판 논란’ 허준영 전 경찰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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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만난 사람=고대훈 사건사회 데스크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사진=김형수 기자]

허준영(55) 전 경찰청장은 26년이라는 공직 경력에 비해 달변은 아니다. 질문에 답하는 데 지나칠 정도로 신중해 오히려 눌변에 가깝다. 하지만 청장 재임(2005년 1∼12월) 시절 핵심을 찌르는 화법으로 유명했다. 독도 문제로 한·일 관계가 시끄러울 때 독도를 방문해선 “지구상에 다케시마는 없다. 독도만 있을 뿐이다”는 말로 논란을 정리했다. 검찰이 수사권을 독점하는 현실을 빗대 ‘권검책경(權檢責警·권한은 검찰이, 책임은 경찰이 진다)’ 는 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2년 가까이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그가 요즘 이슈의 한복판에 섰다. 외교관 5년과 경찰관 21년의 공직생활을 돌아보며 쓴 자서전 『허준영의 폴리스 스토리』가 다음달 초 나오기 때문이다. 책엔 청와대 386 참모진과의 갈등, 청와대의 압력으로 사퇴하게 된 과정,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의 국가보안법 사건 처리 등이 비교적 자세히 담겼다. 현 정부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어서 각종 언론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구설에 오르고 싶지 않아 아는 사람의 전화만 받는다”는 그를 23일 오후 만났다. 서울 여의도 오피스텔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다. 인터뷰는 2시간가량 이어졌다.(※는 독자의 이해를 위한 설명임)

-책을 펴낸 동기는.

“나는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 생활을 한 뒤 경찰관이 됐다. 경찰관과 외교관이 되려면 마음가짐을 어떻게 갖고, 무슨 보람을 느끼는지 청소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한국 경찰은 외국 경찰보다 더 힘들다. 집회·시위를 막고, 야간엔 취객들의 폭력에 시달리고, 수많은 고소·고발사건을 처리한다. 하지만 고생에 상응하는 권한과 보람이 적은 편이다. 선진국이 되려면 경찰과 공권력이 국민으로부터 존중을 받아야 한다.”

-책에서 치안비서관(2003년 2월∼2004년 1월) 시절 함께 일한 청와대 386 참모들을 비판했다.(※허 전 청장은 ‘정권 초기 소주만 찾던 386 참모들이 몇 달 안 돼 1인당 10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호텔식당 음식은 물론 양주도 잘 마셨다’ ‘대통령 비서실에 가 보니 유인태 수석 밑에 비서관 6명이 있었다. 나 외에 5명은 모두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소주·양주’ 문제는 지엽적인 거다. 386에겐 국가경영에 필요한 경륜이 부족했다. ‘선무당이 칼 잡은 격’이었다. 경륜이 없으면 검증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그것도 부족했다. 청와대 비서실 구성은 직업 관료나 전문가 등 브레인으로 다수가 채워져야 한다. 386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했다.”(※당시 유인태 정무수석 밑으로 신봉호 정무기획, 문학진 정무1, 박재호 정무2, 박기환 지방자치, 장준영 시민사회1, 김용석 시민사회2 비서관이 허 전 청장과 함께 있었음. 이들 대부분은 현재 50대 중·후반으로 386세대는 아님. 허 전 청장이 지칭하는 386은 다른 부속실의 비서관을 말함.)

-386참모들과 무엇이 달랐나.

“살아온 방식이 워낙 달랐다. 권력을 갖게 되면 다들 잘해주니까 자연히 스포일(spoil·오염)되는 것이다. 법에 저항하면서 산 사람들이라 법과 원칙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달랐다. 식당에서 나보다 어린 386에게 상석을 권했더니 덜렁 앉았다. 이미 앉았는데 일어나라고 할 수도 없고…. 경찰은 제복조직이지만 나이 많은 직원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배려한다.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있었다.”

 -대통령의 의중인지, 386의 생각인지 구분됐나.

 “청와대 비서실의 생각이 대통령의 생각이라 봐야지, 일일이 확인할 수 없진 않은가.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386 자신들의 생각을 얘기했다.”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 사건 때도 마찰을 빚었다.

“청와대에서 (불구속 수사하라는)힌트가 오긴 했다. 강 전 교수는 인천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 때문에 200여 명의 경찰이 두 달간 하루 24시간 동상 경비를 선 적이 있다. 이태식 주미대사가 미국에 부임하기 전에 경찰청사로 나를 찾았다. ‘제발 동상이 안 무너지게 잘 막아 달라’고 사정했다. ‘대사 갈 사람이 이런 걱정하게 만들어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당시 구속 의견에 반대가 없었나.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정형근 의원이 의견을 물었다. 구속 의견이라고 답했다. 나중에 다른 일이 있어 청와대에 갔을 때 평이 안 좋았다. 청와대 고위 간부로부터 ‘서울청 보안부 수사 직원을 징계해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2005년 12월 사퇴 과정에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나.

“아직까지 많은 사람이 두 명의 농민이 현장에서 맞아 즉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해 11월 15일 여의도에서 농민시위가 있었고 사흘 뒤인 18일 부산에서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정상회의가 열렸다. 당시 김원기 국회의장이 나를 불렀다. 그는 ‘참여정부에서 믿을 것은 경찰밖에 없다. 요새 많이 무질서하니 공권력을 바로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래도 내 지시사항은 ‘집회·시위를 잘 막아라’였지, ‘엄하게 막아라’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폭력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농민 측에선 113명이 부상했다. 그러나 경찰 부상자는 218명이었다. 사퇴는 운동권의 논리다.”

-당시 청와대 기류는 알았나.

“12월 27일 오전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했다. 사자(死者)에 대한 애도 차원에서였다. 그날 아침 황인성(대통합신당 모바일선대위 공동위원장) 당시 시민사회 수석에게서 ‘기자회견을 그만두라’는 전화가 왔다. 내가 오전 기자회견을 취소하고 사표를 내면 오후에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한다는 게 청와대의 안이었다. 무척 불쾌했다. 그걸 거부했다. 그랬더니 민주노동당에서 (나에 대한)탄핵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사퇴를 하지 않고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불법·폭력시위와 공권력 문제를 이슈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때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았을 걸 후회도 든다.”

-퇴임 뒤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많았다.

“현 정부에서 잘나간다는 주요 인사(L·M·Y·L씨를 거론)가 경북도지사 출마를 권유했다. 도지사에 떨어지면 행정자치부 장관이나 국정원에 보내 주겠다며 정권 재창출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마다했다. 국민이 심판해 선거에 떨어진 사람을 기용하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다.”

-경찰 인사에선 정치권 입김이 세다. 어떤 일들이 있었나.

“경찰청장 인사를 앞두곤 (정찬용)인사수석이 자기 사무실로 들러 달라는 전화가 왔다. 내심 내정 사실을 미리 알려주려는가 기대했다. 그러나 ‘경찰청장이 안 되면 무엇을 하려는가. 대사로 나가시는 것은 어떤가’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외교관을 그만두고 경찰관이 됐는데, 안 되면 집으로 가야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 이유를 대라’고 맞선 적이 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고 떠본 듯하다.”

-경찰의 공권력이 왜 아직까지 국민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고 보나.

“사회 전체적으로 다같이 느껴야 할 일을 경찰에 떠넘기고 있다. 농민시위의 경우 농정(農政)이 잘못된 것은 간 데 없고 경찰이 막아야 하나. 경찰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농민과 대치하는가. 경찰 내부에선 ‘하수 종말처리장’이라고 자조한다. 공권력을 확립하라고 하면서도 사고가 나면 경찰만 비난한다. 경찰의 위상도 너무 낮다. 15만 경찰의 총수가 차관급이다. 검찰은 차관급이 54명이고, 육군도 33명이다.”

-불법·폭력 시위가 아직도 문제다.

“많은 국민이 ‘우리 경찰도 선진국처럼 불법·폭력시위에 대해선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말로만 그럴 뿐이다. 시민단체는 도심집회를 금지하는 게 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일부의 인권이 아닌 전체의 인권 차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서울청장이었던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를 관리했다. 당시 촛불집회가 법으로 금지한 야간집회냐, 문화행사냐 논란이 있었다.

“문화행사가 아니라 불법집회였다. 그리고 굉장히 위험했다. 당시 수만 명이 광화문에 밀집했다. 부근 고층빌딩이 250여 개다. 극렬분자가 휘발유나 시너를 뿌리는 테러를 저질렀더라면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을 것이다.(금지하고 싶었으나 그대로 놔두라는)경찰청장의 지시가 있었다.”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배신의 계절’이라고 한다. 현 정부에서 혜택을 입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다.

“혜택을 본 게 아니라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승진한 거라 생각한다. 법으로 정해진 임기(2년)도 못 채우고 나왔다. 정치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갔다고 할 수 있지만 일관된 삶을 살아 왔다. 솔직히 내가 원하는 정부만 들어서는 게 아니다. 다만 공무원으로서 복무를 한 것이다. 거기(대통령의 지시)에 맞추는 게 공무원의 도리다. 어지간하면 맞추고 싶지, 바로 가야 하는데 자꾸 좌회전하니….”

-내년 총선에 나오나.

“정권이 교체되면 내년 총선에 새 바람이 불 거라고 생각한다.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폭넓게 생각 중이다. 가능하면 서울에서 출마하고 싶다.”



허준영은 누구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고, 고려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다녔다. 80년 14회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이 됐다. 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84년 고시 특채를 통해 경찰관이 됐다. “외교관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런던 경찰)와 파리 경찰관의 모습에 반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강원청장으로 재직하다 2003년 2월 대통령 치안비서관에 발탁돼 1년간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유인태 당시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의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 정권과의 특수 관계’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2004년 12월 임기 2년의 경찰청장에 취임했다.

이후 검찰과의 수사권 조정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경찰 내부의 상당한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 사건에 대해 구속 의견을 피력하고, 농민시위에서 농민 두 명이 사망한 뒤론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임기 1년도 못 채우고 중도 하차했다. 현재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회 행정자치위원장이란 직책을 맡고 있다.

정리=이철재 기자 , 사진=김형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