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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매체의 진화를 꿈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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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08면

일본에 가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서점이다. 신주쿠의 ‘기노쿠니야’와 진보초의 ‘산세이도’ 같은 대형 서점은 물론이고 엔터테인먼트 서점이자 잡화점을 표방하는 ‘빌리지 뱅가드’나 체인점인 ‘북오프’를 비롯해 곳곳에 산재한 헌책방에 한 번 들어갔다 하면 순식간에 하루가 지나간다. 서점 한 곳을 들러 나올 때마다 배낭에 들어간 책의 무게로 어깨가 축 처지지만 어딘가 뿌듯한 기분이 든다. 세계의 모든 책을 만날 수 있다는 일본에서는, 오로지 책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여행을 만끽할 수 있다.

비틀거리는 ‘잡지 천국’ 일본

세밀한 분야마다 풍성한 읽을거리
책을 만나는 즐거움 중에서도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잡지다. ‘잡지 천국’이라는 찬사처럼, 일본의 잡지 시장은 무한대의 여흥을 제공한다. 남성지, 여성지, 문화지, 라이프스타일지 등의 일반 분류는 물론이고 나이와 관심 분야에 따라 모든 잡지가 구비되어 있다. 이를테면 남성지는 50대의 일하는 남성을 위한 ‘괴테’라는 잡지가 한 예이듯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로 구분되어 있다.

옷은 기본이고 시계, 구두 심지어 헤어스타일까지 아이템별로 각각의 잡지가 나온다. 취미생활에 관한 잡지는 말할 것도 없다. 어떤 분야든, 어떤 아이템이건 모든 잡지가 이미 나와 있다. 정기간행물이 아니라면 적어도 무크지는 있다. ‘별책보도’ ‘아에라 무크’ 등 하나의 주제를 잡지 스타일로 다양하면서도 나름대로 깊게 파고드는 무크지가 일본에서는 활성화되어 있다.

일본에 다녀올 때마다 잡지만 수십여 권을 사 오는 이유는, 잡지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잡지는 잡다한 소식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부루터스’ ’타이틀’ ‘스튜디오 보이스’ 등 문화지에서는 특집기사에 50쪽 내외의 분량을 할애하는 게 기본이다. 심한 경우는 고정기사를 제외하고 몽땅 특집 하나로 도배를 한다.

일본 추리소설에 대한 특집기사라면 베스트를 선정하고, 전문가에게 추천작을 받고, 추리물의 역사를 훑는 것은 기본이다. 대표 작가로 『인간의 증명』의 마쓰모토 세이초를 꼽았다면, 작품 세계는 기본이고 그의 소설에 등장한 일본의 모든 지역을 찾아가 사진에 담기도 한다.

추리소설에 등장한 술에 대한 기사가 읽을거리로 붙을 정도다. 특집기사 하나로 일본 추리소설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흐름은 읽을 수 있다. 일본의 잡지는 모든 것을 담으면서도 확실하게 세부를 파고든다. 그게 일본 잡지의 가장 좋은 점이다.

10월 말 일본에 갔을 때도, 잡지는 여전히 풍성했다.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수많은 사람에게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수한 잡지가 각축을 벌이는 일본 잡지 시장은 언제나처럼 화려했지만 일본 출판사 관계자에게 들은 내막은 좀 달랐다. ‘잡지에서 돈을 버는 시대는 끝났다‘가 일본 출판계의 보편적 인식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새로운 잡지가 창간되고, 언제나처럼 잘 팔리는 잡지도 있지만 시장 자체는 축소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잡지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매거진 하우스’ 같은 출판사는 최근 잡지보다 단행본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한다. 수익이 광고로 들어와야 하는 잡지보다는, 확실한 주제로 특정한 독자를 타깃으로 한 단행본이 안정적이라는 이유다.

‘잡다함’의 총아 인터넷엔 역부족
일본의 잡지 시장이 위축되는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일본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오프라인의 활자매체 전반이 흔들리고 있다. 잡지는 말 그대로 ‘잡다한 것’을 다루는 책이다. 깊이보다는 다양하고 세세한 것을 다루는 경향이 짙다. 잡다하고 시시콜콜한 것으로 따지면, 잡지는 인터넷의 정보량을 따라갈 수 없다. 속보성에서도 당연히 뒤진다.

잡지가 일간지에 비해 보다 깊은 내용을 다룰 수 있고 전방위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해도 세세한 내용이 이미 인터넷에 다 올라와 있는 상황에서 잡지의 경쟁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래서 잡지는 더욱 읽을 것을 강화하고, 동시에 사진과 레이아웃을 포함해 볼거리가 확실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그건 단행본이 더 낫지 않을까. 곳곳에 광고가 끼여 있어(광고도 요즘엔 하나의 기사 역할을 하지만) 난삽한 잡지보다는, 하나의 주제를 확실하게 다룬 단행본이 소장 가치도 더 높다. 여전히 잡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잡지가 생존할 수 있는 요인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잡지를 비롯한 책의 ‘깊이’를 내세워도, 앞으로도 그런 깊이를 요구하는 독자가 광범위하게 존재할 것인가에는 의문이 있다.

일본의 젊은 세대는 책보다 만화가 더 익숙하지만 최근에는 만화 시장조차 침체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슈에이샤의 ‘월간 소년 점프’가 휴간에 들어갔다. 사실상의 폐간이다. 휴간 원인은 ‘(잡지를) 유지할 만큼 팔리지 않아서’다. 창간한 지 37년이 되었고, 한때는 140만 부까지 팔리던 만화잡지가 폐간한 것도 뉴스거리이지만 놀라운 것은 판매부수가 40만 부였다는 점이다.

한때 600만 부가 넘게 팔리는 잡지도 있었던 만화 시장이었지만, 지금은 만화 자체보다는 피겨나 게임 등 주변 상품으로 더욱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것은 단일한 문화상품으로는 수익을 올리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일본에서 만화잡지가 가능한 것은, 일단 만화를 대중에 공개하는 장으로서 기능하고 그 지점에서 출발하여 다른 연관 상품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일반 잡지에는 그런 요소가 희박하다. 잡지의 콘텐트가 ‘원 소스 멀티 유즈’로 확장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콘텐트를 온라인에 파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수익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지극히 일본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단카이 세대’의 퇴직이 출판 시장의 침체를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 1948년 전후에 태어난 단카이 세대는 60년대 말 학생운동을 통과하여 70~8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을 이끈 세대다. 책은 단카이 세대에게 오락이자 교양으로서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이 세대가 일본 중심부였던 70~80년대는 일본 잡지의 최고 전성기였다. 책과 함께 성장한 단카이 세대이지만, 이들이 퇴직을 하면 과거만큼 책을 많이 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는 내다보고 있다. 무엇보다 출퇴근 때 지하철에서 책을 보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 큰 타격이다.

이런 단카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시장 개척도 시도되고 있다. 최근 창간한 ‘엑스타임’이란 잡지는 단카이 세대의 젊은 시절인 70~80년대에 유행했던 영화·노래·TV프로그램 등을 다루며 향수를 자극한다. 퇴직을 했지만 단카이 세대의 구매력은 이전 세대보다 높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의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실버 산업, 노후 대책 등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오고 있다.

활자 매체, 새로운 출구 모색할 때
일본 잡지 시장의 침체를 한국에서 바라보기란, 무척이나 심란한 일이다. 한국의 잡지 시장은 오래전부터 지리멸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외국 라이선스 잡지를 들여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고급이건 대중적이건 제대로 된 문화지를 찾아보기도 힘들며, 분야별로 번듯한 잡지 이름 하나 대기도 힘든 것이 한국 잡지의 현실이다. 게다가 ‘인터넷 강국’의 현실은 기존 활자 매체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전반적인 위축만이 아니라, 기존의 오프라인 매체가 온라인에 진출하여 성공을 거둔 예조차 없기 때문이다.

온라인 영화잡지 중 1위를 달리던 ‘엔키노’의 폐간은, 오프라인 잡지의 기사 포맷과 구성을 그대로 온라인에 가져가는 것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오프라인 기사에 동영상 몇 개 추가로 올린다고 해서 온라인 잡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온라인 잡지 중에서 수익모델을 제대로 만들어 운영하는 곳은 없다. 결국 온라인 잡지는, 기존 오프라인 잡지와는 다른 시스템으로, 다른 방식의 콘텐트가 만들어져야 한다.

활자 매체는 이미 영상 매체와의 싸움에서 고전하다가 인터넷이라는 엄청난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빈사지경에 몰려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활자 매체의 패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활자 매체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활자가 사라지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활자는 인류 문명의 시작인 동시에 근간이다. 책 역시 마찬가지다. 책의 환경이 모니터로 바뀔 수는 있겠지만, 책이라는 콘텐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일본의 잡지 시장이 위축되고 있는 현실은, 반대로 활자 매체가 새로운 시장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잡지시장은 어떨까. 아직 제대로 성숙하지도 않았으니까,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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