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가 특종 보도 안했다면 국내학자 개가 外信 베낄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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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에 참여한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장이 12일 서울대병원에서 생체 내 세포 분화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국내 과학자들이 세계 최초로 사람 난자에서 줄기세포를 배양해 내는 개가를 올렸다. 세계는 한국인의 저력에 놀라고 있다.

중앙일보는 이 내용을 지난 12일자로 특종보도했다. 그러나 13일 국내 일부 언론이 미국의 과학잡지 사이언스가 현지에서 정해놓은 엠바고(취재원이 요구하는 일정 기간까지의 보도 자제 요청)를 깼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엠바고를 깨는 바람에 국제적 위신이 추락했다"고 폄하했다. 하지만 본지는 오랫동안 관련 사실을 추적해 왔으며, 어떤 엠바고 요청도 받지 않았다. 일부에서 뒤늦게 제기한 엠바고 논란은 과연 정당한가.

◇"국내 언론엔 엠바고 요청 없어"=서울대 황우석.문신용 교수 연구팀이 이번 성과를 올리기까지 2년여가 흘렀다. 연구진만 14명이었고, 서울대 의대 등 여섯 곳이 관여했다.

본지는 이미 지난해 말부터 黃교수 주도의 연구진이 획기적인 연구 성과를 냈다는 사실을 포착, 두달에 걸친 탐문취재를 해왔다. 이 과정에서 연구 내용을 파악했고, 최근 논문의 원문을 단독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마리아병원 박세필 박사 등 전문가를 대상으로 취재한 결과 이미 상당수가 黃박사의 연구 성과를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본지는 국내 과학자들이 이룬 세계적 쾌거임에 틀림없다는 확증을 갖고 보도한 것이다. 본지가 먼저 보도하지 않았다면 국내 독자들은 한국 과학자의 자랑스러운 업적에 대해 사후에 외신 보도를 베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물론 중앙일보는 보도 이후 미국에서의 기자회견 일정이 일부 차질을 빚은 점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지의 홍혜걸 의학전문기자는 이와 관련해 우리의 과학기술부나 黃교수 등 연구진에게서 어떤 엠바고 요청도 받은 적이 없다. 본지뿐 아니라 다른 국내 언론기관에도 엠바고 요청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탐사보도는 엠바고와 관련 없어"=취재원과 기자 간의 엠바고를 둘러싼 논쟁은 외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의학.과학 부문에서 특히 많다. 대개 취재원이 정식으로 요청하고, 기자가 수용 의사를 밝힌 경우 엠바고가 성립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기자가 그 이전부터 사실을 추적해 왔고, 정식으로 요청받지 않았다면 엠바고가 성립되기엔 무리라고 보고 있다. 최근 미국에선 엠바고임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 이전에 충분한 취재를 마친 경우 엠바고 파기로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02년 7월 미국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는 1만6천여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호르몬 대체요법에 대한 연구결과를 단독 보도했다. 공식 발표보다 앞선 시점이었다. 엠바고 파기 논란이 일자 30년의 의학부문 취재경력을 지닌 여기자는 "엠바고 요청 이전에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언론사 측도 "독자의 알 권리가 우선이며, 취재가 된 상황에서 엠바고를 무조건 수용하는 건 언론의 굴욕"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박영상 교수는 "엠바고는 지고지선의 가치가 아니며 기사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주목적"이라며 "중앙일보의 보도가 오랜 취재를 거쳤고 엠바고 요청을 받지 않았다면 엠바고 파기 운운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험담 강요"=黃교수는 12일 밤 중앙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중앙일보 보도 이전엔 전혀 사실을 몰랐던 기자들이) 오늘 수십차례 전화를 걸어와 중앙일보를 욕하는 발언을 유도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동아일보 등 어디에 대해서도 중앙일보 보도나 기자를 험담한 적이 없으며 이는 한국에 가서 확실히 밝힐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한 방송사 간부는 "중앙일보하고만 거래하느냐"며 黃교수에게 육두문자까지 썼다고 한다. 黃교수는 "중앙일보의 보도와 관련, 나와 우리 연구진 누구도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며 "모든 내용은 중앙일보 기자가 독자적으로 취재한 것"임을 강조했다.

한편 일부 국내 언론은 뉴욕 타임스 등이 "한국의 언론 때문에 엠바고가 지켜지지 않았다"며 본지의 보도 태도에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해외 주요 언론사들은 본지기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 연구결과만 발표했으며, 뉴욕 타임스는 "사이언스가 정한 엠바고 하루 전에 한국의 신문이 보도했다"고만 전했다.

김택환 미디어 전문기자, 이상복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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