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뇌물…상자만 진화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뇌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돈을 담은 상자만 진화할 뿐이다.

삼성그룹이 이용철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만원 짜리 100장 다섯 묶음을 건 낸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이때 사용된 돈 상자가 배달용으로 대량 제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전 비서관은 삼성 이경훈 변호사가 자신에게 건 낸 돈 상자에 대해 “박스가 기가 막히게도 500만 원이 딱 들어가는 크기였다”고 최근 폭로했다.

이 전 비서관의 말대로 100만 원짜리 돈 다발 5개를 가로 3개, 세로 2개로 포갤 경우 가로 16cm, 세로 23cm, 높이 2cm 정도의 상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중의 상자 제작업체에는 이 크기의 상자가 흔치 않고 있다고 해도 다량으로 주문생산을 해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삼성이 돈 배달용 상자를 대량 주문 제작했을 가능성이 수면 위로 올랐으나 아직 확인되지는 않은 상태다.

◇‘단골’ 사과상자=뇌물 전달에 애용되는 상자는 단연 사과상자였다. 지난 1997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사과 상자(2억4000만원)와 라면 상자(1억2000만원)로 100억여원의 뇌물을 정ㆍ관계에 뿌리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추석 때 사과상자가 선물로 들어오면 “혹시 돈 없나 찾아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2002년 현대차 그룹이 50억원씩 2차례에 걸쳐 한나라당에 전달했을 때도 사과상자가 이용됐다. 속칭 ‘차떼기’ 수법으로 당시 검찰은 1만원권으로 만든 2억원짜리 사과상자 10개와 1억원짜리 사과상자 30개 등 모두 40개씩 두 차례에 걸쳐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전달됐다고 밝혔다. 이보다 앞서 1996년 전두환 대통령 비자금 사건 때도 쌍용양회 경리 창고에서 사과 상자 25개(61억원)가 발견돼 국민의 분노를 샀다.

◇돈 세탁은 생선 비린내로(?)=지난 2~3년 전까지 현금에 묻은 뇌물의 냄새는 '생선 비린내'로 없애는 경우가 많았다. 2004년 건설업체 대표로부터 현금 2억원이 든 굴비상자를 받은 혐의(뇌물 수수)로 안상수 인천시장이 기소됐지만 무죄로 풀려난 일이 있었다. 당시 검찰은 굴비상자에 2억원의 거금이 들어간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었다. 2005년 검찰은 한국마사회 비리 사건에 등장한 뇌물 수단으로 간고등어와 초밥 상자가 이용됐다고 밝혔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간고등어 상자에 현금을 가득 채우면 3000만원, 초밥 상자는 300만원이 들어간다. 굴비, 간고등어, 초밥…모두 수산물과 관련돼 있었다.

◇금융실명제 이후 무조건 현금=뇌물 전달에 상자가 애용된 것은 1993년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부터였다. 고액 수표는 자금 흐름이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대신 현금이 동원됐고 부피가 큰 현금 뭉치를 남몰래 전달하기 위해서는 각가지 도구들이 필요했다. 사과ㆍ간고등어ㆍ굴비ㆍ초밥 상자 이외에도 1억~3억원엔 골프가방이, 1억원에는 007가방이, 3000만원 정도엔 고급 양주 상자가, 5000만원엔 케이크 상자 등이 사용됐다. 남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고 품위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원권 화폐 작아져 액수 더 커질 듯=2009년부터 발행될 5만원권과 10만원권 현금이 유통되면 검은 돈 규모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1만원권 크기보다 크기가 작고 단위도 5~10배 가량 크기 때문이다. 가장 작은 단위였던 초밥 상자에는 3000만원까지 담을 수 있고 사과상자 역시 20억원까지 채울 수 있다. 나중엔 빼빼로 상자로도 섭섭치 않을 정도의 뇌물이 오갈 수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고액권을 인출할 때 용도를 기입하게 하는 등 ‘고액권 현금거래 보고제’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지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