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새역학구조>3.북한의 입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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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오는 21일 공식 서명되는 北-美합의서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대목은 북한이 정치적 명분을 포기하고 40억달러 상당의 경수로와 연락사무소라는 실리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당초 특별사찰과 한국형 경수로 불가를 강력히 주장하던 북한의강석주(姜錫柱)외교부부장은 협상 과정에서 슬그머니 입장을 변경해 특별사찰과 방사화학실험실 해체,그리고 한국형 경수로를 수용했다. 즉 북한 입장에서 보면 제네바 협상은 40억달러+α라는경제적 이득을 얻는 대신 자신들의 핵주권을 거의 포기한 셈이다. 북한은 이번 협상결과로 새로 등장하는 김정일(金正日)의 위상을 높일 수 있게 되었지만 군부등 내부의 강경파를 무마하고 이제까지 적으로 규정해온 미국(美國)과 남한의 지원 수용을 설명해야 할 부담을 안았다.
그런데도 북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분을 포기하고 실리를 선택한 것은 김정일의 등장과 그후를 생각하는 전략때문으로 보인다.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한의 차기 외교목표는 북한-일본 수교다. 현재 北-日 수교회담은 92년12월 8차회담을 끝으로결렬된 상태다.
당시 북한은 일본에 과거문제에 대한 배상금조로 1백억달러를 요구했다.
북한은 北-美합의의 여세를 몰아 내년 3~4월께 北-日수교 협상을 마무리짓고 배상금을 확보할 생각이다.
외무부 한 소식통은 『북한과 일본은 지난 8월 베이징(北京)에서 상당히 심도있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며 『북한이 오는 11월께 北-日 수교회담을 재개,이면계약 방식으로 외교적 실리를얻어내려 할 공산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이같은 4强 외교 추진 과정에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장해온 「하나의 조선」논리를 포기해야만 한다.
즉 북한은 北-美.北-日 수교를 통해 결국 주변 4强과 교차승인 확보의 대가로 그동안 대남(對南)사회주의 혁명의 명분으로내세워온 하나의 조선을 더이상 내세울 수 없게 된다.
북한의 실리외교 정책이 곧바로 김정일의 대내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현재 북한의 모든 정책 초점은 새로 출범하는 김정일 체제 보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모든 대외.대내 정책 수준도 이같은 목표를 만족시키는 한 의미있을 뿐이다.
또 자신의 아버지에 비해 카리스마가 부족한 김정일은 당분간 김일성(金日成)의 유훈(遺訓)을 강조하며 신비화 정치를 시도할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또 핵문제와 관련,북한에 향후 2~3년이 중대 고비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금처럼 북한이 핵문제의 모호성을 유지하는 한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특별사찰등 국제적인 압력이 한층 강화되 개방에 반대하는 세력들과의 내부갈등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보면 북한의 당분간 나진(羅津)-선봉(先鋒)지역에 국한된 방충망식 대외개방을 추진하면서 김정일의 체제유지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북한의 제한적인 방충망식 개방도 김정일에게 적잖은 골칫거리로 등장할 전망이다.
비록 제한적인 개방이라도 외부의 정보와 상품이 일단 폐쇄적인북한 사회에 침투할 경우 그 파급효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클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통일연구원의 길정우(吉炡宇)정책실장은 『서방과의 교류가 김정일에게 단기적으로는 체제안정에 도움을 줄 것이나 장기적으로는 체제안정에 기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통일원은 또 북한이 당분간 한국을 자신들의 주적(主敵)으로 삼는 기존 전략을 고수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북한처럼 교조적인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의적이 필요한데 이제 미국과 수교하고 일본과 협상을 서두르는 마당에 남아있는 유일한 대상은 서울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가 이같은 북한의 움직임을 감안,당분간 기능적이고 간접적인 대북(對北)정책을 유지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세종연구소의 김덕중(金德重)박사는 『그동안 정부가 단계적 대북정책을 취해 모든 남북관계가 현재 교통체증이 걸려 있는 상태』라며 『당분간은 우리정부가 경협등을 재개해 가면서 차분히 지켜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崔源起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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